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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6/26/19
[특별기고] 북한 김일성 정권의 기독교 뿌리
이창기 목사(프랑크푸르트한인교회 목사, 철학박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하시는 이창기 박사님의 ‘북한 김일성 정권의 기독교 뿌리’란 논문을 앞으로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창기 박사님은 네델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서 Ph.D학위를 받고 현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서 론

 

작년(2018년) 월과 올해(2019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역사적인 미북 정상회담이 각각 싱가포르와 월남의 하노이에서 열렸다. 북한의 김정은(1984~) 최고 지도자와 미국의 트럼프(1946~) 대통령은 비핵화 문제 및 한반도의 평화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세계의 언론은 한반도의 비핵화 및 평화 문제와 관련하여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남북 한반도의 대결은 온 세계가 풀어야 할 지난 세기, 소위 ‘냉전’의 세기가 남겨 준 마지막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평화를 갈망하는 온 세계는 트럼프의 제안에 김정은이 어떻게 응답할지 몹시 주목하였다.

북한 정권은 현대 세계에서 보기 드문, 꽤 오랫동안 유지된, 심지어 공산 국가 중에서도 끝까지 견딘 마지막 정권이다. 김씨 왕조는 70여년 3대에 걸쳐 할아버지 김일성(1912-1994)은 1948년에서 1994년까지, 아버지 김정일(1941–2011)은 1994년에서 2011년까지, 손자 김정은(1984- )은 2011 년부터 지금까지 북한 주민들을 통치해 왔고, 주민들은 그들을 ‘친애하는 수령’, ‘위대한 수령’, ‘민족의 태양’, ‘위대한 영도자’ 등으로 불러왔다.

많은 이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북한 정권의 지도자인 김일성은 열정적인 기독교인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기독교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부모는 충실한 기독교인들이었고 김일성 자신도 교회에 출석하였고 일정 기간 감리교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와 교회학교를 맡아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 연구는 한반도의 평화 통일에 대한 세계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특별히 김일성 가문에 대한 관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김일성 가문의 뿌리에 기독교가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에는 몇 가지 제한이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배제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또는 주체 사상, 또는 민족 주의나 정권에 대한 비판, 또는 통일 문제 등은 논의되지 않았다. 또한 김일성 가문의 기독교 뿌리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김일성 이후, 김정일 시대나 김정은 시대는 취급되지 아니하였다. 더불어, 김일성의 양친들은 모두 개신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기독교 중에 개신교만 다루게 되었다.

북한에서 출간된 출판물들은 일반적으로 그 지도자들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내용을 과장하거나 개조하여 정치적 선전에 오염된 경우가 많아 그 진정성이 의심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1992~1998년 북한에서 출간된 8권의 김일성 자서전, ‘세기와 함께''''를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였다. 이는 그 자서전 속에 그의 젊은 시절의 성장 과정과 그 부모의 삶에 대한 내용을 추적할 수 있는 정보가 많고 특별히 이 연구의 관심이 정치적 선전과 상관이 없는 기독교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일성의 자서전도 이 연구의 자료로 사용되었다.

제1장은 서론이다. 제2장에서 기독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어떻게 들어왔으며 초기 부흥 운동이 김일성 가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설명하였다. 제3장부터 5장까지 각각 김일성 모친과 그의 가계, 그리고 그의 부친과 그의 가계, 그리고 그 외 기독교인들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제6장에서 김일성 자서전 속에 나타난 기독교의 유산들을 기술하였고 제7장에서는 김일성 모친을 기억하기 위해 설립한 철골교회에 대하여 기술하고 제8장에서 이 연구의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들의 기독교 수용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 선교 분야에 있어서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경우 중에 하나”이며, “현대사의 경이 중에 하나”요 하나의 “매혹적인” 역사, 또는 “하나의 꿈같은 이야기…. 이며 사도행전의 한 장”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마치 “폭발하듯” 빠르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기독교는 “비극적인 땅에서 벌어진 비극의 기록”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교회가 그의 지리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한동안 참혹한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단원에서는 기독교가 한국에 유입된 과정과 선교사들의 선교 내용을 짧게 기술하며 그 후에 김일성 가문이 한국교회 초기 부흥 운동이라는 큰 흐름 속에 어떻게 한국 개신교와 접하고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를 기술하고 한국 교회 초기 부흥 운동에 관해서도 설명할 것이다.

 

기독교의 한국 전래

 

흥미롭게도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천주교회나 개신교회를 막론하고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들 스스로가 기독교 복음을 한반도 밖에서 한반도 안으로 들여 왔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882년 5월 22일 한미 통상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한 동안 외국인들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고 따라서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이 거절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때까지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한반도 주변 밖에서, 북쪽으로는 만주에서, 남쪽으로는 일본에서, 각각 맴돌 수밖에 없었다.

만주에는 중국인들과 조선인들 사이의 통상을 위해 공식적으로 ‘고려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많은 조선인 이주자들이 살고 있었다. 만주에서 한국인 교회가 처음 세워진 것은 기독교로 개종한 김청송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는 로스 선교사(John Ross, 1842-1915)의 성서 번역을 돕다가 예수를 영접하고 1882년에 세례받았다.

일본에서는 학술 연구를 위해 일본에 와 있던 이수정(1842-1886)이 도쿄에 있는 한 교회에서 일본인 목사 야스카와에게 1883년 4월 29일 세례를 받음으로 “일본에서 한국인 첫 개신교 교인”이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이수정도 세례 받을 때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한반도의 땅을 밟은 몇몇 서양인들이 있었다: 얀 벨트브레(박연, 朴淵, Jean J. Weltevree, 1595~?)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1627년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도 네덜란드 사람이었는데 그는 동료 35명과 함께 1653년 8월 15일 배가 파선되어 제주도에 표류함으로 한국에 억류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1666년 조선을 탈출하여 ‘난선 제주도 난파기’ ((蘭船濟州島難破記, Journal of the Unfortunate Voyage of the Yacht Sparwer)라는 표류기를 써서 서양에 한국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한국인들에게 처음으로 성경을 보급해 준 사람은 영국인 바실 홀(Basil Hall, 1788-1844) 선장으로 1816년 그는 한국 해안을 탐사하며 지도를 작성하던 중 배를 탐문하기 위해 왔던 하급 공무원 조대봉에게 세 권의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1832년 7월 17일 첫 개신교 목사로 한국 땅에 발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독일인으로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왔던 칼 귀츨라프(Karl F. A. Gützlaff, 1803-1851)이다. 그 후 33년의 세월이 흘러 몇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기를 힘썼다. 그들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1839 –1866),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1829-1890), 죤 로스(John Ross, 1842-1915), 그리고 죤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1857-1928)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9월 2일 한국 선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1884년 인천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북쪽에서는 관서 지방으로 한국인 대리인들을 보냈고 남쪽에서는 일본에서 부산으로 대리인들을 보냈다.

이성하는 한반도 북쪽의 압록강을 건너 자기의 고향 의주를 찾아와 은밀히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만주의 심양(Mukden)을 떠날 때 그는 많은 성경책과 책들을 운반해 왔다. 이성하가 병으로 죽게 되자 박홍준이 뒤이어 국경을 넘어 고향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한글 성경이 한국 안으로 유입되었다. 그는 시골 마을을 다니며 열심히 전도하였으며 반년이 되기도 전에 교인 10명을 얻었고 그의 집에서 기독교 첫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개신교회가 최초로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과 한국은 1882년 5월 22일 군산에서 ‘한미 통상조약’을 맺었으며 이로부터 한국은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였고 서양에 그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도 1883년 5월 13일 루시우스 푸트(Lucius H. Foote, 1826-1913)를 한국에 최초의 미국 정부의 공사로 파견하였으며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 목사는 1884년 9월 20일 최초의 의료 선교사이자 미국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에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목사 부부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로, 미혼이었던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목사가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로 동시에 범선 쯔리에 마루 호에서 제물포항에 발을 디딤으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같은 날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취했던 두 가지 선교 방법들은 의료 선교와 학원 선교였으며 그 선교 방법들은 한국 선교에 성공적으로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국인들은 당시 영양실조,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치료들,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전쟁들, 가난 등으로 인해 긴급한 의료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상황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의료 선교사들을 통한 기독교 수용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질병으로 난파된”(Fred H. Harrington ) 많은 한국인들은 육체적인 치료가 절실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무시무시한 병들: 예를 들면 거의 일반화돼 버린 매독, 흔한 나병, 만연된 장티푸스, 천연두, 간질, 이질, 말라리아, 결핵”등으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 제도는 역사적으로 통일 신라 시대(618-935)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유교의 전래와 더불어 교육 제도도 정치 관료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의 사설 교육 기관은 고려 시대에 해동공자라 불리는 최충(984-1068)에서 시작되었는데 사설 교육 기관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쳐 20세기 초까지 번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 제도는 계급 사회의 한계와 성적 차별의 한계가 있어서 양반 계급의 자제들만, 그리고 남자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교육 과정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단지 유교적인 문학 서적들만 공부하였고, 그래서 전통적인 교육 제도는 단지 유교와 양반 사회 구조를 지탱해 주고 있었으며, 결국 교육이란 유교의 양반 계급이 독점하고 있었고 지식이란 단지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교육 방법은 한국인들을 계급 사회와 성적 차별에서 해방해 주는 역할도 하였다. 중인, 상인, 천인 등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배울 기회조차 없었고,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었고 남성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부하나 아랫사람 정도로 여겨졌다. 여자들은 남성들 틈에 끼지 못했고 지적 훈련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선교사들의 의료 선교와 학원 선교의 활동은 한국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급속히 한국 토양에 그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김일성 가문과 부흥 운동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 운동’(cf., Chang Ki Lee, The Early Revival Movement in Korea(1903-1907), 2003; 이창기, 한국교회 초기 부흥 운동, 2006)은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어 한반도로 번져 1907년에는 평양에서 그 절정으로 이루게 되었다. 바로 김일성이 탄생한 1912년보다 5년 전 일이다.

따라서 김일성 자신은 부흥 운동을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두 부모와 그의 지인들은 1907년 평양 부흥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부친 김형직과 그의 은인이었던 손정도 목사는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함께 다녔다. 그 학교는 부흥 운동 기간에 부흥 운동의 불길에 휩싸였고 1907년 그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학교는 미국의 북 장로교회에 속해 있었고 윌리엄 베어드 목사(Rev. William M. Baird, 1862-1931)가 교장이었으며 그곳에서 봉직했던 헌신적인 선교사들이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손정도 목사는 1907년 평양에 있던 남산현 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부흥회에 참가하였고 그곳에서 하나님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도행전 1: 6절에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묻자, 주님께서 7절에 답변하시기를,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을 평양의 한 부흥 집회에서 만났다. 강반석은 김형직의 뜨겁고 열렬한 기도에 깊은 매력을 느꼈고 결국 이것으로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김일성 자신은 부흥 운동을 보지 못했으나 이미 그는 부흥 운동의 강한 영향 아래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엽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인들에게 서양 종교 내지 선교사들의 종교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1903-1907년에 ‘부흥 운동’이라는 위로부터 내려 주신 ‘축복의 소나기’(호세아 10:12)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 부흥 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는 한국인들 심성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한국 사회에 굳건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부흥 운동의 초기 역사의 중심에는 부흥 운동을 촉발했던 로버트 하아디(감리교 선교사, Robert A. Hardie, 1865-1949) 목사가 있다. 하아디는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여 서울로 옮겼으며 후에는 원산에 정착하여 1898년까지 6년 동안 캐나다 의료 선교회에 속한 선교사로 봉직하였다. 하아디는 하나의 작은 선교사들 모임에서 설교 부탁을 받고 준비하면서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닫고 목회자로서 그간의 불충함을 회개하였다. 동시에 그는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죄의 고백은 그후 부흥 운동 전 기간을 통해 나타난 가장 특이한 현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죄 고백은 처음 선교사들에게 번졌고 다음으로 한국인들에게 번져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1903년 원산에서 모였던 감리교 선교사들의 성경연구반은 1904년 8월에는 연례 성경 콘퍼런스의 일부분으로 발전되었다. 또 이것은 장로교와 침례교, 및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 모임이 되었고 그것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부흥 운동에 불쏘시개가 되었다.

1904년 8월에 시작된 연례 원산 성경 콘퍼런스로부터 부흥 운동은 원산 지역을 넘고 감리교 교단을 넘어 번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부흥 운동의 두 번째 물결이 1905년부터 1906년까지 한반도를 강타하였다. 그 불은 평양으로 번졌고 평양은 한반도 북쪽 지역의 부흥 운동 중심지가 되었으며 부흥 운동은 점차 서울과 한반도 남쪽으로 번져 내려갔다.

두 차례의 전쟁, 중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 휩쓸린 한반도는 초토화되었고 이 전쟁들은 조선왕조의 몰락을 재촉하였으며, 사회 환경은 새로운 종교 운동들을 받아들여 “사회적 정치적 열망들을 해소해 줄 수 있는”(Kenelm Burridge) 길을 열어 주었다. 부흥 운동이 잘 준비된 상황이었다.

1906년 이후 부흥 운동은 1905년 한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조직한 ‘복음 선교회 총회’(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에서 만든 계획표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한국 복음 선교회 총회는 1905년 9월 감리교와 장로교 여섯 개 선교회의 150여 대표가 모여 조직한 것이다. 그 총회에서 만든 계획표가 실행되면서 선교사들이 애초에 예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부흥 운동이 그 주류가 감리교회로부터 모든 개신교회들로, 원산 지역에서 한국의 전 지역으로 그 분수령을 넘게 되었다. 그 부흥의 불길은 특별히 장로교회들을 뒤덮었으며 그 결과 장로교회는 1910년까지 그 교세가 끊이지 않고 급격히 증가하였다.

1906년부터 평양의 중앙 장로교회가 부흥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유능한 부흥사들을 선교지 곳곳에 파송하였다.

1906년에는 평양 인구 중 40%가 기독교인이거나 ‘암묵적 교인들’이 되었다. 많은 술집이 장사가 안돼서 점차 문을 닫기 시작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2,500명이 넘는 대규모의 회중들이 모이자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더 넓은 건물을 짓기 위해 논의를 해야 했다. 중앙 장로교회의 회중 숫자는 1,564명에 이르렀다.

한국의 부흥 운동은 1907년 1월 평양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기간을 일컬어 “평양의 오순절”(길진경), “위대한 부흥” (Spencer J. Palemr), 혹은 “오랫동안 기억될 날들”(William N. Blair)이라 하였다. 평양의 부흥 운동은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 운동이 이어진 것이다. 평양의 부흥 운동은 점차 전국 교회로 부흥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게 하는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에 대해서는 평양에서 사역했던 선교사들의 목격담보다 더 생생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는 없다.

이 부흥 운동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그의 모친 강반석을 열심히 기도하는 열성적인 교인들과 성실히 교회에 출석하는 건실한 교인들이 되도록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1907년 평양의 부흥회에 참석해서 서로 만났으며 그 성령의 뜨거운 불길은 그들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도록 그들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하여 한 가정을 꾸리게 한 그들의 사랑에도 영향을 주었다. 바로 그 가정에서 마침내 김일성이 출생하게 된 것이다.

 

김씨 왕조의 건설자 김일성

 

김일성은 부친 김형직과 모친 강반석 사이에서 1912년 4월 15일 평양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 양친들을 두었고 기독교 가정과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 자신도 교회에 열심히 다녔고 세례까지 받았다.

김일성의 양친들은 기독교인의 삶에도 헌신적이었지만 그들 자녀들을 돌보는데도 헌신적이었다.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은 김일성을 분만할 때에 36킬로그램의 몸으로 5킬로그램의 아이를 낳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심에 감사해서 산고도 쉽게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cf., 김일성의 유년생활, 2009, 이렇게 36 킬로그램의 작은 엄마가 5킬로그램의 아기를 낳은 것은 과장된 것 같다).

김일성은 모친의 지극한 애정 속에 잘 자라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김일성은 그의 부친을 14세 때에, 모친은 20세 때에 각각 잃게 되었다. 김일성의 부친이 죽자 장례식장에 그 부친의 옛 동료들이었던 오동진을 비롯하여 몇 명이 모여 14세에 불과한 김일성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면서 의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김일성을 1926년 화성의숙이라고 하는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 산하의 무관학교에 2년 기한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최동오는 그 학교 교장이었고 당시 가난해서 12살의 자기 아들조차 북경에 있는 자유원이란 보육원에 보낼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최동오는 김일성을 초대해서 극진히 대접해 주었고 김일성이 잊지 못하는 존경받은 은인이 되었다(cf., 한홍구, “기구한, 참으로 기구한….”). 최동오는 김일성을 주목하고 수업 중에도 천도교를 가르쳤다. 천도교는 한국의 토착 종교로 애국심과 우주적인 사랑을 강조한다. 학교에도 천도교 신자들이 꽤 많았다. 김일성도 그 가르침에 감화를 받았고 호감도 보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천도교를 믿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천도교는 하늘을 믿는다. 그것도 조선의 하늘을 믿는다…”(Ibid.)고 하였다. 그 말의 뜻은 ‘비록 내가 천도교를 믿지는 않더라도 천도교가 조선을 강조하기 때문에 나는 천도교를 받아 드린다’는 것이다(오랜 후 1948년 김일성은 남쪽에 살던 그의 옛 스승인 최동오를 평양으로 불러 만났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북한으로 불러 최동오를 보살펴 주었고 최동오는 1963년 북한에서 죽었다).

1927년 김일성은 그의 부친과 삼촌이 속해 있었던 중의부(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기관)가 지원하는 중국의 길림성의 중국인 중학교 유원(혹은 육문) 중학교로 전학하게 되었고 1928년 그가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마르크스주의자 사반(謝潘, 혹은 상위예 Shangwiye)이란 선생에게서 공산주의를 배웠다. 그러나 그 이듬해 1929년 5월 그의 ‘조선 공산청년회’에 연루된 것이 발각되어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만주 지역에서 항일 빨치산 조직에 가담하고 활동하였다. 1940년 10월 23일 그는 국경을 넘어 16명의 동료와 함께 러시아로 건너가 망명을 신청하였고 러시아 정부의 보호 아래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있는 군사 시설에 기거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1941년 2월 16일 그의 아들 김정일을 낳게 되었다.

1942년 7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뱌츠코예에 중국 만주에서 몰려온 항일 조선인 망명자들로 구성된 88여단을 새로 창설하게 되었으며 김일성은 그곳에서 대위 계급을 달고 제1대대 대대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945년 8월 15일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훈련하며 지냈다.

김일성은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조국 건설을 위해 1945년 8월 초 88여단 내의 몇 몇 조선군인들과 합세해서 ‘조선공작단’(단장: 최용건)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그 후 김일성은 러시아 군대에서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45년 8월 8일 조선공작단원들 중 몇몇은 러시아 군대와 함께 조선 반도로 진입하여 ‘국내 진공 작전’에 가담하였고 다른 단원들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들어왔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22일 기차로 평양에 도착했으며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김일성은 승전국의 자격으로 북한에 진주하여 북한 일대를 통치하게 된 러시아 군대에 의해 북한의 지도자로 선발되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새로운 정부 북조선 인민민주공화국을 세웠고 그 통치자가 되었으며 김씨 일가의 대대 통치를 시작하는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

 

김일성 모친 및 외척과 기독교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모친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느낀다. 간혹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 개인의 삶 속에 그의 모친이 끼치는 영향력이란 참으로 지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모계도 김일성 자신이 말했듯 그의 부친보다 그의 모친의 영향이 훨씬 컸으며 그래서 그의 모계와 기독교의 관계를 먼저 서술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강반석(1892-1932)은 김일성의 모친으로 김일성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가 진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하는데 다른 의견이 없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 반석이란 성경에 나오는 이름 베드로, 반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힘들 때마다 송산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곤 하였다.

김일성은 그의 모친의 기독교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어머니는 예배당에 다니었지만, 예수는 믿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어머니, 어머니는 하나님이 정말 있어서 예배당에 다니시나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가로 흔들었다. ‘무엇이 있어서 다니는 것은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 가서는 뭘 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sic.) (cf., 김일성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

그러나 김일성의 이와 같은 증언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옛 공산당의 교훈에 충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고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많은 증인과 증거들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학자들은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이 충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강반석이 오래 살지 못해서 그의 아들 김일성에게 보다 더욱 충실한 기독교 신앙을 물려주지 못했던 점이 아쉽다. 그녀가 40세에 죽었던 1932년 김일성의 나이는 20살이었다.

강돈욱(1871-1943)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로 창덕 학교를 설립하였고 그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며 그 지역에서 교육자로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칠골교회의 장로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강돈욱과 교우들의 열심 있는 전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도 했다. 김일성이 중국 팔도구를 떠나 고향인 만경대에 1923년 3월 29일 도착하여 만경대에서 며칠 머물었던 김일성이 칠골 외가집으로 옮겨 2년간 외할아버지의 돌봄을 받으며 당시 창덕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였다.

당시 외할아버지 강돈욱과 외삼증조부 강양욱은 그 학교의 교사로 김일성에게 기독교 교육을 가르쳤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외할아버지의 기독교 신앙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김일성의 회고록에는 외할아버지 강돈욱의 기독교인 생활에 대한 기록이 없다. 강양욱 목사(1902-1983)는 김일성의 외삼촌으로 장로교 목사였으며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조선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상임위원회 서기장 등을 지내고 1972년 국가 부주석이 되었으며

1981년 부주석에 재선되었다. 김일성의 외 삼종조부이며 칠골 창덕 소학교 당시 담임이었고, 강돈욱의 6촌 형제였다. 강양욱은 김일성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김일성의 지근거리에 있어서 누구보다 김일성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선생으로, 집안 어른으로, 공산혁명 동지로, 협조자로, 측근 정치인으로 있으면서 그는 훌륭한 기독교인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김일성 부친 및 친척과 기독교

 

김형직(1894-1926)은 김일성의 부친으로 미국 북 장로교회 소속의 베어드 선교사(Rev. Dr. W.M. Baird, 1862-1931)가 1897년에 설립한 평양의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숭실중학교 시절이었으며 그 후 그는 미션 스쿨인 명신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낮에는 이 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고 밤에는 계몽 운동과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다.

김형직의 기독교 신앙생활에 관해서 말할 때 김일성 자서전의 내용은 다른 많은 자료의 내용과 상치된다. 많은 자료는 그가 열심 있고 훌륭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들 중 하나는 김형직의 친구로 숭실중학교 동창이었던 배민수(1896-1968) 목사(김일성은 자서전에서 배민수 목사를 언급하면서 애국적인 독립운동자라고 하였다)의 증언이다. 배민수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형직은 만주에서 왔는데 조국 재건을 위한 일념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는 만주의 지하운동과 의병 활동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말할 때마다 뜨겁게 불타는 눈빛과 신념에 가득찬 음성으로 우리 모두를 매료시켰다.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해서 우리 중 누구도 앞으로 그에게서 그렇게 무서운 기독의 적,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태어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므로 모임이 끝날 때는 늘 기도를 했다. (중략) 우리의 기도는 항상 뜨거운 눈물과 함께 바쳐지는 기도였다”(배민수, 배민수 자서전: 누가 그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북한교회연구원장 유관지 목사는 김형직이 훌륭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강동욱이 그의 딸 강반석을 그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김형직은 가난했고 강동욱의 형편은 비교적 넉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의 자서전에서, “사상으로 보면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신학(新學, ‘새로운학문’)을 가르치던 숭실중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주위에는 교인들이 많았고 따라서 나도 교인들과 접촉을 많이 하였다”(김일성 자서전, 제1권 79쪽)고 하였다. 또한 증언하기를, “아버지가 체포된 다음 날부터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명신 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리었다”(Ibid.)고 하였다.

김일성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형직은 아들 김일성에게 애국심을 힘써 길러 주었다고 한다. 김형직은 아들에게 “글을 배워도 조선을 위하여 배우고 기술을 배워도 조선을 위하여 배우며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Ibid., vol. 1, p. 20)고 가르쳤다. 그 자신은 훌륭한 기독교 신자였으나 그가 아들에게 신앙을 물려주기에는 너무 이른 1926년 그의 나이 32세, 김일성의 나이는 14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보현(1871-1955) 김일성의 할아버지와 이보익(1876-1959) 김일성의 할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자서전 속에서도 그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어떤 언급도 없다.

 

그 밖에 김일성 주변의 기독교인들

 

손정도(1882-1931) 목사는 한국 감리교회 목사로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통령을 지냈으며 일찍이 1901년에 한국 감리교의 협성신학교(현 서울감리교신학대학)를 졸업하였고 1915~1918년에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가 정동감리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교인들이 급증하여 2,300명에 이르러 한국에서 당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뿐만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늘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목회 활동과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중국 만주로 떠났다.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의 은인으로 가장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다. 김일성이 아버지를 잃었을 때 그의 나이는 14세에 불과했고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 숭실중학교를 함께 다녔고 그 당시 김형직과 손정도, 오동진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었었다. 김형직이 죽자 손정도 목사와 오동진은 김형직의 아들 14세의 김일성을 맡기로 했다. 그 후 오동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들에 의해 체포되었기 때문에 손정도 목사가 김일성을 맡아 자기 친 아들처럼 3년간 돌보게 되었다. 그 때 김일성은 성가대를 인도하였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일성이 항일 운동으로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자 손정도 목사는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의 딸 손은실을 보내 감옥에 있는 그를 돕기도 했다. 결국 김일성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하였고 그래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김일성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길림에 와서 육문 중학교에서 3년동안이나 공부할 수 있은 것은 손정도와 같은 아버지의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어머니의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겨우 유지되어가는 우리 집의 구차한 살림살이를 걱정하면서 나에게 학비를 여러번 대주었다. 목사의 부인도 나를 몹시 사랑해 주었다. 명절 때면 그 부인이 나를 청해다가 조선식으로 맛있는 음식도 해 주었다”(sic.)(Ibid., vol. I, p. 221). 뿐만 아니라 그는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 손원태와 지냈던 일도 회상하며 손정도 목사와 그 식구들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표하였다.

오동진(1889-1944)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의 친구들 중하나 일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몹시 존경하고 깊은 애정을 표했던 사람이다. 한 때 오동진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기 전까지 만주의 길림 자기 집에서 김일성을 돌보기도 하였다. 오동진 역시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김일성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김일성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인상을 준 것보다는 애국자로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손원태(1914-2004) 박사는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김일성의 친구였다. 그는 후에 미국에 이민을 하여서 1991년 김일성의 초대로 둘이 죽기 전에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그 후에 1994년에 죽었고 손원태 박사는 2004년에 죽었다. 그들의 만남은 세계 미디어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손원태 박사도 역시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았지만, 김일성의 신앙 여정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김창주(1890-1959) 목사는 한국 감리교회 목사로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8년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도왔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이 김일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그 외에 김규식과 여운형도 모두 기독교 신자들이었고 김일성과 동지들이었지만 김일성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김일성 자서전에 나타난 기독교 유산

 

‘유산’(heritage)이라 함은 고대 프랑스어 heriter ‘물려 받기’에서 왔다. 그 단어는 라틴어 hērēditāre 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선대로부터 어떤 것을 물려 받는 것을 말한다. 보통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어떤 것, 즉 전통이나, 언어, 건물들, 역사나 습관이나 신앙 등을 가리킨다.

김일성의 자서전에 나타난 기독교의 유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김일성의 선대로부터 전해온 유산이 있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이 후손들에게 전해준 유산이 있다. 김일성의 자서전 속에는 후자에 속한 유산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후자는 다음 단원에서 “김일성 모친 기념교회”에서 다룰 것이며 이 단원에서는 김일성의 선대로부터 전해온 기독교 유산, 즉 김일성의 자서전 8권 속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 기독교인 은인들, 선교사들의 기독교 가르침과 기독교 정신 등을 논할 것이다.

김일성 자서전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유산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 및 교회 건물들일 것이다. 김일성은 평양이나, 길림이나, 포평리와 봉화리 어느 곳에 가든지 교회를 다녔든 기억이 있다.

김일성은 평양 만경대에서 어머니와 그의 외삼촌과 함께 장로교회를 다녔다. 김일성은 어려서 교회에서 선물로 주는 사탕이나 공책을 얻기 위해서 어른들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청년 시절엔 공산주의 청년 학습을 위한 모임으로 만주 길림성에 있던 교회를 사용하였다고 회상한다. 바로 그 길림성 교회에서 이전에 언급한 김일성의 후원자 손정도 감리교회 목사가 시무하였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자유스럽게 그의 목적대로 그 길림 교회에서 한국 소년단을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었다. 그 교회는 김일성뿐만 아니라 다른 항일 독립 운동가들도 모이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근처에 독립 운동가들이 자주 들르는 삼풍진 여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그 부친이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들에게 체포되어 구금되자 봉화리 교인들이 그의 석방을 위해 새벽기도를 드려 준 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였다. 김일성의 부친은 그에게 항일 연설문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은 또한 그 부친이 다녔든 포평교회를 부친이 공산주의 학습을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과 이곳저곳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모임 장소로도 사용했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김일성은 기독교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지만, 기독교를 ‘미신’으로 여겨 자기를 따르는 젊은이들을 ‘기독교 미신’에서 깨우쳐 ‘계몽’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젊은 여선생을 통해 아이들에게 ‘기독교의 무익함’을 실험을 통해 체험케 하였다. 김일성의 지시대로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가서 온 종일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도해도 어떤 음식도 어떤 응답도 없었다. 그다음 날 아이들을 데리고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나가서 이삭을 줍게 하였다. 그들은 상당한 양의 곡식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김일성의 아이들은 ‘기독교의 미신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김일성은 ‘미신을 타파한다’는 구실 아래 교회들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농민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종교의 자유’를 변호하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일성 주변의 기독교 후원자들과 진심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들은 김일성에게는 두 번째로 더 없는 기독교 유산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양친들이 신실한 기독교인들이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누구나 어렸을 때 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꺼내다 보면 감상에 젖게 되는데 김일성도 역시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 얘기를 꺼내면서 감상에 젖었다. 김일성은 자기 어머니가 몹시 지칠 때마다 교회를 찾았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어머니는 김일성의 마음속에 교회에 대한 따듯한 추억을 남겨 주었다.

손정도 목사와 그의 아들 손원태 박사도 김일성의 기억 속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은 손원태 박사를 가리켜 정치와는 거리가 먼 너무나 순수하고 진실한 성품의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와 손원태 박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일경들에게 체포되어 길림성에서 1년 이상 갇혀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깊이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손정도 목사는 항일 독립 활동에 기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래서 일경들은 손정도 목사를 가리켜 항일 그룹의 ‘제3세력’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젊은이들의 활동을 적극 최선을 다해 뒷받침했으며 김일성이 요구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나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교회에 나가기를 좋아하였고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다.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해 준 기독교 유산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시설들은 김일성에게 또 다른 기독교 유산이었다. 그는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와 그곳 선교사 선생님들에 대하여 기술하기도 했다. 그 학교는 당시 새로운 학문에 관심 있는 전국의 젊은이들 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그 학교에서는 새로운 학문, 예를 들면, 역사나 수학, 지리, 물리, 위생학, 생리학, 체조, 음악 등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의 부친도 그 학교의 학생이었다. 김일성은 그 학교를 “선교사들이 내 세운 교육목적과 관계 없이 숭실중학교에서는 훗날 독립운동선상에서 큰 활약을 한 이름있는 애국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은 이 학교를 ‘배일사상의 책원지’라 하였다. 만약 유산이란 단어의 의미를 ‘어떤 물려 받은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선교사들을 미워했던 것도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 시민 10만 명 가운데 단지 일본 사람들과 선교사들만 여유있게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비참하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일본인들만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미워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천도교나 기독교, 불교가 1919년 항일 3.1운동을 벌여 그 불길을 붙인 것에 대하여 감사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자서전에서 기독교 용어인 사랑과 구원 등을 무의식적으로 자주 사용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정신세계에서 기독교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 8권에서 그는 사랑이란 말을 601번 사용하였다. 한국어에는 똑같이 ‘구원’을 의미하면서 그 쓰이는 용도가 기독교 교회에서 빈번히 사용하는 ‘구원’과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구출’이 있다. 김일성 자서전에서 ‘구원’이란 용어는 127회 등장했고, ‘구출’은 단지 35회 사용되었다. 이것을 보건대 아마도 김일성의 마음은 기독교 유산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김일성 모친 기념교회

 

 

전 세계의 종교의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해 힘쓰는 ‘국제 종교의 자유’ 뉴스의 2014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 네 개의 교회: 두 개는 개신교회, 천주교회 하나, 러시아 정교회 하나, 이렇게 네 개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 연구에서는 김일성의 모친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칠골교회를 깊이 다루고 또 다른 개신교회인 봉수교회는 간단히 언급하고 지날 것이다.

칠골교회는 김일성의 생모 강반석을 기념하는 교회로 일명 반석 교회라고도 불리며 북한의 평양 서쪽 광복거리에 있다. 원래의 칠골교회는 김일성 모친이 다녔든 하리라는 동네에 동네 이름을 딴 하리교회였으며 1899년 세워졌다가 6.25 전란 중 1950년에 파괴되고 말았다. 1989년 김일성은 그 교회 건물과 함께 교회 마당에 자기 어머니 동상도 함께 세웠다. 그 교회는 개신교회로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도록 하였다.

칠골교회가 세워진 결정적인 계기는 1989년 5월 평양 주민들이 교회를 세워달라고 청원한 데서 시작된다. 김일성은 그곳을 둘러보고 당시 국방위원장인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가능한 대로 하리 마을에 원래 교회가 있던 장소를 찾아내어 그곳에 교회를 짓도록 임무를 주었다.

북한에서는 칠골교회를 세우는데 최덕신(1914-1989)의 역할이 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덕신은 김일성이 한 때 만주에서 공부했던 무관학교의 교장 최동오의 아들로 김일성과는 친구였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남한에 거주하며 대한민국 육군에서 장교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하고 서독에 대사로 발령 받아 근무했지만 미국으로 망명하고 그 후 부인 류미영 여사와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싣고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향했다.

최덕신은 옛 친구 김일성을 만나 옛날 어린시절 얘기를 하는 중 교회 얘기가 나왔으며 김일성은 옛날 얘기를 하면서 그의 어머니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 손잡고 예배당에 나갔던 생각이 납니다.” (이계성, 평양의 봉수교회 )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어머니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교회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였고 결국 칠골교회가 있던 자리를 찾아내 그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김주원, 북한의 교회: 칠골교회).

1980년대 후반에 칠골교회를 포함해서 북한에 교회들을 세우게 된 또 다른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1989년 평양에서 열렸던 제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는 서양 방문객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북한 당국은 그들이 예배드릴 장소를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3년 후에 벌어질 국가적인 큰 행사를 준비하면서 그 이름에 걸맞게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국은 알았고 그래서 이전에 있던 교회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 교회를 세우는데 북한 당국은 약 5천평의 땅을 기증하였고 칠골교회와 북한의 기독교연맹과 한국을 포함한 외국 교회가 10만 불의 헌금을 하였다. 칠골교회 교인들 스스로 교회를 짓는 데 노력 동원을 하였고 담임목사인 유병철 목사가 직접 교회 건축을 이끌었다.

마침내 1992년 11월 28일 방문객과 고위 당국자들을 포함 100여명의 참여자가 모여 봉헌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92~2014년 사이에 많은 외국인 방문객이 찾아왔고 그들 중에는 남한의 교인들이나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도 포함되었다.

2013년 4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칠골교회는 세 번째 건축을 완공했다. 일요일에 보통 100여명의 출석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외국인들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이 장소를 ‘칠골 혁명사적지’로 지정했다. 이 지역에는 칠골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칠골 혁명사적관’과 ‘칠골 외가집’, ‘창덕학교’ 등이 밀집되어 있다. 이 지역을 강반석의 이름을 따서 ‘반석공원’이라 부르고 있다.

봉수교회는 평양 만경대 구역 건국동에 위치해 있다. 봉수교회는 원래 1988년 9월에 세워졌으며 이는 한국 동란 이후 북한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그 건축 비용은 미화 25만 불이 소요되었으며 해외의 교인들이 헌금하였다. 그 교회는 2008년경쯤 더 큰 교회로 장소를 옮겨 다시 지어졌고 현재 약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2008년 장소를 옮겨 재건축 하면서 미화 430만 불이 들었으며 남한 장로교연합회에서 그 비용을 충당해 주었다. 남한이나 해외에서 방문객이 방문했고 그 중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가 1994년에, 그의 아들 프랭클린 목사가 2000년과 2008년에 각각 방문하였다. 칠골교회와 봉수교회, 두 교회는 지금도 평양에 있으며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외국인에게도 남한 교인들에게도 항상 개방되어 있다.

 

결론, 잡기, 전망

 

결론: 김일성 자신은 자서전에서 주장하기를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기독교의 주위 환경 속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기독교인들과 여러 은인의 도움을 받으며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살았다. 김일성 자신은 그의 젊은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며 그의 모친과 혹은 부친과 그의 동생들과 함께 교회에 다녔든 즐거운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때로는 그의 부친이 교회에 있는 풍금을 그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김일성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많은 증인은 그가 손정도 목사 교회의 교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교회의 성가대 지휘를 했다는 것, 교회학교 아동들을 가르쳤다고 하는 것, 그리고 손정도 목사에게 세례까지 받았다고 하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 (손정도 목사의 손자 손명원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참조: 김형은, op. cit., BBC Korea).

서울에 있는 연세대학교 총장이었던 박대선 목사는 강양욱과 가까운 친구였는데 그가 증거하기를, “김일성은 빨치산 활동할 때 군가를 부른 다음엔 꼭 ‘피난처 있으니’ 등의 찬양을 부르곤 했다”며 “김일성은 신앙을 좋아했다”(유관지)고 밝혔다.

 

잡기(雜記): 칠골교회나 봉수교회 교인들이 진짜 교인들이냐 가짜 교인들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 왔다. 그 교회들을 방문했던 방문객의 의견도 둘로 갈라진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그 교인들은 당 간부들이거나 또는 당 간부들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 즉 가짜 교인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은 평양의 진짜 교인들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매우 흥미롭고 생생한 증언이 있다. 바로 카타콤 뉴스가 최근에 전해준 소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카타콤 뉴스, 모퉁이돌 선교회, 2018년 07월 호): 봉수교회와 장충천주교회가 세워진 후 공산당 당국에서 시민 중에 교인 역할을 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명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고위급 간부들로 교회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진짜 교인들이 아니라 가짜 교인들이었다. 처음엔 그들도 될 수만 있으면 교회에 가지 않으려 했으며 핑계만 있으면 구실을 대서 교회를 빠지곤 하였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그들로 주일 예배에 억지로라도 참석토록 하기 위해서 출석표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무언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눈치챘다.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주일예배 참석자들이 늘기를 시작한 것이다. 교인들이 100퍼센트 자발적으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출석표가 쓸모없게 되었다. 예배 참석자들은 점차 그들의 종교

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가짜 교인들이 어느 날부터 진짜 교인들이 돼 갔던 것이다.

당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봉수교회에 가까운 아파트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살피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들은 어떤 젊은이들이 교회 담벼락에 기대서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젊은이들은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로 교회 안에서 들려오는 찬송가의 다양한 곡을 배우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학교에서는 주로 4분의 2박자로 된 행진곡풍의 곡만 작곡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경고만 받고 풀려났다.

그다음 또 다른 수상한 사람들을 발견했는데 그 일로 당국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이 예배 시간만 되면 교회 주변을 서성이는 것이었다. 그들도 곧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밝혀진 사실은 그들은 아주 오래전 교인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으며 기독교 예배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심은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러 갔어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전망: 우선 두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이 현실적으로 열렸다고 하는 것과 김정은이 처음으로 철의 장막을 열고 은둔의 나라에서 온 세계 앞에 ‘커밍아웃’을 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다. 이것은 마치 ‘큰비’(왕상 18: 45하)를 이끌고 왔던 ‘손바닥만 한 구름’(왕상 18: 44상)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두 정상의 만남은 오랫동안 메말랐던 북한의 대지 위에 축복의 ‘큰비’를 내리게 했던 예표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하늘로부터의 기도 응답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과 교회, 조직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특별히 북한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뜨겁게 기도해 왔던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그 세 아들이 백양나무처럼 잘 자라기를 바라고 세 아들이 나라를 일본 제국에서 해방시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 그루의 백양나무를 ‘집오래’ (북한 사투리. 한글 사전에도, 인터넷 북한어록에도 없음. 뜻을 모름)에 심었다.

그의 첫 번 소원인 조선의 독립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희망인 조선인들이 풍요롭게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은 북한에서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백성들을 풍요로 이끄는 길을 신명기 사관에서 잘 보여준다: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승리와 번영으로 상 받고 불순종하는 것은 거룩한 심판과 고통과 실패를 가져온다.” (Bernhard W. Anderson, Understanding the Old Testament, 3 rd ed., p. 111.) 여호와를 찾고 그를 순종하는 것이 번영와 풍요의 길인 것이다.

김정은은 자기 가문의 기독교 뿌리를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살려야 한다. 그러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의 자랑스러운 옛 별명을 다시 회복할 것이며, 그리고 한국 교회 역사 가운데 제2의 부흥 운동을 불 붙여 줄 것이다. 그러면 제2의 부흥 운동의 불길이 한반도를 집어 삼킬 것이며 그래서 남북의 통일로 이끌어줄 것이다. 그러면, 에스겔 선지자의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 17)는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면, 온 세상은 큰 소리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 1) 화답하게 될 것이다.

 

 

이창기 목사 약력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위트레흐트 대학교(네덜란드) Ph. D.

육군 군목/ 동춘천교회 담임목사

바드 크로이츠나하 교회 (독일) 담임목사

헤이그이준기념교회 (네덜란드) 담임목사

(현) 프랑크푸르트교회 (독일) 담임목사

 

[저서 및 역서]

- The Early Revival Movement in Korea (1903-1907), Boekencentrum Publishing House, Zoetermeer, 2003.

- “영미 개신교 선교사업에 대한 유럽 대륙적 인식과 비판” (역서: Jan. A.B. Jongeneel, European Continental Perceptions and Critiques of British and American Protestant Missions), 선교와 선교학, 한들출판사, 2005.

-한국교회 초기 부흥운동 (1903-1907), 보이스사, 2006.

-조선의 아사셀, 이준, “내 의로운 자를 기념하라” (이준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 설립보고서), 은암출판사, 2018.

 

주소: Kaiser-Sigmund-Str. 50, 60320 Frankfurt am Main, Germany

▷연락처: T. 069-9459-8008, e-mail: haguelee@yahoo.co.kr

 

 

좌로부터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외조부 강돈욱 장로, 모친 강반석
김일성의 은사 손정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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