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역사의 양심 헐버트(Homer B. Hulbert) 선교사는 누구인가?

호머 헐버트 선교사[사진=위키피디아]
헐버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건국훈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수훈
1886년 23살의 나이에 조선을 만나 63년을 한민족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선교사는 한민족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남기고 정의, 인간애, 애국심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답했다.
헐버트 선교사의 생애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베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 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았던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조선이 곧 망할 조짐이 보이던 1905년 이후 조선을 손절했지만, 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또한 대한민국의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수여 받았다. 한글 학회에서는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의 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의 취재기 ‘인간 이은’에 따르면, 제물포(인천) 항으로 배를 타고 방한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여기가 제물포, 인천이라는 지명을 똑똑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자신이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며 연신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내탕금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왔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내탕금을 되찾아 독립 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그것을 찾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내탕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내탕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내탕금을 털어간 후였다. 설사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겪은 초인플레이션 문제 등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다.

최초로 아리랑을 문서로 기록한 헐버트 선교사를 기념하여 세워진 문경새재 아리랑 기념비
민족혼 아리랑의 최초 채보자
1886년 한국에 온지 석달만에 어린이들로부터 아리랑을 듣고 감동하여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아리랑을 채보했다.
세종시대부터 쓰여온 육보, 정간보 같은 전통적인 기보법이 있었지만 그동안 아리랑은 채보되지 않았었다. 1896년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이란 논문에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과 ‘군밤타령’을 서양음계로 붙여 채보하여 한국소식 2월호에 발표, 한국음악사에 양악보 시대의 지평을 열었다.
이 논문에서 헐버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조재”라고 아리랑의 의미를 정의했고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이며 한국인이 노래하면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도 평가했다.

헐버트 선교사가 쓴 최초의 순 한글교과서 ‘사민필지’의 모습. 띄어쓰기가 안되어 있지만
나중에 주시경과 함께 띄어쓰기를 개발한 것도 헐버트 선교사였다[사진=위키피디아]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사민필지는 161쪽으로 한자가 하나도 없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교과서다. 헐버트는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책 이름을 ‘사민필지’라고 붙였다.
이 책 서문에 한글이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중국 글인 한문으로 모든 사람이 빨리 알지 못하고 널리 볼 수 없으며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 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요”
그리고 양반과 서민, 남녀모두에게 배움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남녀와 신분의 차별없는 평등사상을 담아내기도 했다.
역사학자로서의 헐버트 선교사
1905년 800쪽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했다. 한국사는 단군시대부터 고종시대까지 망라하여 상세하고 폭넓게 기술하였다.
헐버트 선교사는 15년에 걸쳐 동국통감 등 고서들과 씨름하며 한국사를 썼으며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말기를 포함한 역사 자료를 확보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1906년에는 한민족의 기질, 한국의 문화, 전통, 풍속, 산업, 사회제도를 집대성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헐버트는 을사늑약 이듬해 영국 런던에서 출간된 이 책에서 한국의 나라를 잃는 처지를 애처로워하면서 일본의 침략주의를 강력히 고발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하여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데 동의한 자신의 모국, 미국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양화진에 있는 헐버트 선교사의 묘지석. Man of Vision and Friend of Korea 라고 씌여있다.
헐버트 선교사의 주요 어록
“영국인들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언젠가 한자를 버릴 것이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원한 노래가 될 것이다.”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일본 외교는 속임수가 전부다."
"3.1운동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