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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교계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1/23/25
남겨놓고 싶은 이야기들 . . . “클레어몬트의 추억”
김찬희 박사(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23년 동안 봉직하다가 은퇴한 지도 벌써, 일하였던 기간보다 더 지난 지금, 그 때 있었던 몇 가지 남겨 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여기에 적어 보고자 한다.

나는 지금부터 근 50여 년 전인 1977년 7월 1일에 클레어몬트에 부임하였다. 그 당시 나의 타이틀은 Director of the Center for Asian-American Ministries and Assistant Professor of New Testament였다. 연세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겸 종교주임으로 일하다가 1972년에 사임하고 미국에 돌아온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연세대에서는 전교생의 필수 교양 과목인 ‘종교(기독교)’ 과목을 위한 행정적인 일도 겸하고 있었다.

 

1968년에 연합감리교회가 탄생되었때, 흑인 교회로만 구성되어 있던 Central Jurisdiction 제도가 없어짐으로써 흑인 교회들이 약화되었기에 연합감리교회 총회는 소수민족 교회 강화 정책과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채택하였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네 개의 소수 인종 교회, 곧 흑인·히스패닉·아시안·미원주민 교회의 지도자 양성 및 강화를 위하여 네 개의 신학교에, 센터나 혹은 특별 프로그램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이때 아시안 교회를 위하여서는 클레어몬트에 하나의 center를 설립하게 되어 본인이 그 첫 소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나는 시간 절반을 센터를 운영하는 데 썼으며 나머지 절반은 가르치는 일에 바쳐야 했다. 처음 클레어몬트에 와서 내가 놀란 것은, 이 대학원의 총장부터 건물 관리 직원들까지 모두 백인 일색이었다는 사실이다. 인종 차별이 심한 미 남부도 당시에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공부하고 한때 일하였던 테네시 주 내쉬빌도 1964년 새 민권법 제정된 이후로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내가 이 학교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전임으로 임명된 소수 민족계 교수였으며 또한 미주에서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규 신학대학원의 교수가 된 것이었다. 1987년에 Center를 떠나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될 때 정교수(Prof. of New Testament and Christian Ministries)가 되었다. 마침내 역사상 처음으로 인종 차별을 철폐하여 개정된 1965 이민법으로 인하여 한인들이 70년 대 초부터 미국에 대거 이민 오기 시작함으로써 교회도 이에 따라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5%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민자들 중 약 35%가 이미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된 이들이었으며, 미주에 와서 또한 35%의 한인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미주 한인들의 기독교인 비율이 70%나 되었다. 이렇게 밀려오는 한인 이민 신자들을 연합감리교회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한인 교역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었다.

 

클레어몬트 신학교 전신인 맥클레이 신학교 창립자 찰스 매글레이. 맥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하여 한국에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윤허를 받아 낸 인물인 로버트 맥클레이의 두 살 위 형이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리하여 나는 이 센터를 통하여 이민 온 교역자들에게 미 연합감리회를 알리는 일뿐만 아니라 한국 감리교회를 미 감리회 지도자들에게 알리며 소개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크게 실망스러웠던 것은 대부분의 연합감리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감리회가 자기들의 대외 선교로 시작된 교회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한 감리회 정회원 목사들의 안수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한인 교회는 우후죽순처럼 날로 늘어나고 있었으나 목회자들이 이전처럼 많이 이민 오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1987년부터 센터 일을 내려놓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센터는 김신행 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맡아 일하게 되었으며 나는 새 한인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이 동안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시도하여 보았으며, 한인들을 위한 M. Div. Program뿐만 아니라 D. Min. Program도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클레어몬트대학원에서 Ph.D. 학위를 받은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이들이 미주 안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활약하며 한국 교회에 지도자로서 공헌하고 있다. 이 당시에 졸업하고 안수받고 목회하기 시작하였던 졸업생들은 벌써 은퇴할 나이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마음이 뿌듯한 것은 한인들을 위한 장학기금을 설립한 일이다. 한인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당시 총장이었던 Bob Edgar 총장에게 한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 기금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30만 불을 모금하여 이에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기에, 그것보다도 영구적인 장학 기금을 마련하고 투자하여 이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재정 지원을 하여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니 그도 이를 쉽게 받아들였다.

 

나는 전임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여야하기에 모금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이 모금 활동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였다. 마침 그 때 박대희 목사님이 떠올라 그에게 부탁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셔서 그는 삶을 마치실 때까지 크게 모금하시며 도와주셨다. 일 년쯤 지난 후 박 목사님을 도와드릴 평신도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기에 LA연합감리교회의 존 장(장홍식 장로)님께 도와주실 것을 부탁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셔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이 기금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며 모금할 직원이 학교에 없었으나 내가 은퇴할 때까지 그래도 100만 불 정도가 모금이 되었으며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이를 책임질 전임자를 학교에서 채용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많은 기금을 모금하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 수 없다.

 

또 한 가지 생생히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날 총장을 보좌하는 일을 하고 있는 Fred Coots 목사 부인인 Betty Coots와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이 학교를 누가 세웠는지 아느냐고 나에게 물으면서, 그 가 Charles Maclay라고 하기에 나는 깜작 놀랐다. 그가 바로 한국감리교회의 첫 선교 감리사였으며, 당시 승정원에서 일하던 김옥균을 통하여 한국에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세울 수 있는 윤허를 받아 낸 인물인 Robert Maclay의 바로 두 살 위의 형이었기 때문이다.



 

1885년 샌퍼난도에 세워졌던 맥클레이 신학교의 모습. 이 신학교는 맥클레이 사망 후 USC대학교에 합병되었다가 후에 클레어몬트 신학교로 독립되었다[사진출처=위키피디아] 

 



나는 나중에 Robert Maclay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아보고 그에 관하여 여러 글을 썼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선교감리사였으며 한국 선교에 관하여 세 개의 글을 남겼는데, 이로 인하여 지금 한국 감리교회에서 초기 선교의 역사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그의 공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1887년 은퇴하여 귀국한 후 형이 세운 우리 학교의 전신인 Maclay College of Theology의 Dean으로 일하다가 190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제 시대 한인 목사들이 많이 유학하였던 일본의 아오야마가꾸인(靑山學院)을 설립한 선교사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2015년에 서울에 갔을 때, 우리 졸업생이며 당시 감독 회장이었던 전용재 감독을 만나려고 감리교회 본부를 찾아 갔었는데, 그 때 본부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물어 보았더니 한국 감리교회 선교 130주년 기넘 행사 준비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또한 놀라며 한국감리교회는 선교 130주년이 2015년이 아니라 2014년이며, 1934년에 대대적인 선교 50주년 행사를 한 적이 있으며 그 기록물들이 남아 있으니 찾아보라고 하였다.

 

나중에 미국에 돌아와서 보니 그 행사를 ‘아펜셀러 내한 130주년’으로 고쳐서 부른 것을 보았다. 그 이후로 지금은 대한감리회가 1885년을 선교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1884년의 윤허를 선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Maclay의 Dickinson College 20년 후배인 John F. Goucher의 재정적 지원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보내 준 당시 $2,000로 Maclay가 조선에 갈 수 있었으며 그 영수증이 잘 보관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의 한국에 관한 일기를 번역하여 한국 교회사학회 학회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이후 한국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기 시작하였지만, 앞으로 그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기 바란다. 그가 언더우드를 재정적으로 도와 연희전문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보고 있지만 아직 그 증거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누구든지 그에 관한 연구를 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Henry Appenzeller의 후손들과 그의 사돈이 되는 Noble 선교사의 후손들과 우연히 알게 되어 그들의 나머지 유품들을 한국에 보내며, 옛 배재학당 자리에 Appenzeller와 Noble 선교사를 위한 역사관을 설립하는 일을 도우며 공헌하였다. 이에 관하여 남기고 싶은 말이 많이 있지만 지면 관계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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