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나은진 목사의 장례식이 라스베가스 중앙교회서 열렸다
<NV> 고 라은진 목사의 장례식이 지난 2월 22일(토) 오전 11시 라스베가스중앙교회(7570 Peace Way, Las Vegas, NV 89147)에서 라스베가스목회자협의회장으로 열렸다.
임인철 목사(라스베가스중앙교회)의 사회로 열린 예배는 제니퍼 하지먼(Trinity UMC) 목사의 기도 후에 박은호 목사가 스가랴 14:1~5까지의 성경말씀을 봉독한 후 둘째 아들 라 삼의 조가, 이재광 목사가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겨자씨 한알교회의 이기용 목사가 고인의 약력을 소개했고 신상만 목사(칼팩 UMC 목사)가 조사를 했다. 라스베가스 한인교회 목회자 부부 찬양단의 조가 후에 라철진 목사(생명의 문 감리교회)가 유족인사, 정용지 연합감리교 은퇴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장례식에서 지역 한인 목회자 부부들이 조가를 부르고 있다
지난 2월 5일 향년 73세로 별세한 라은진 목사는 경상북도 대구에서 나사행 목사와 조문사 장로의 가정에서 태어나 미 연합감리교 데저스 사우스웨스트 연회에서 1994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2년부터 미국에 거주하였고 1967년 양정중학교, 1972년 경신고등학교, 1978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미술학사), 1992년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고 졸업했다.
가족으로는 라상화 사모와 두 자녀가 있다.
한편 이날 장례식에는 남가주지역의 은퇴 목회자 등 옛 동역자들이 많이 참서했는데 정용치, 김광진, 임재만, 이은철, 김낙인, 최성섭 목사 부부 등이 참석하여 유족을 위로했다.
[조사] 고 라은진 목사님을 추억하며

신상만 목사
라은진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였습니다. 그때 나 목사님은 노총각 이셨고 저는 숫총각 이었죠. 목사님은 목사로써는 보기 드물게 예술대학을 나오셨지요. 목사님은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보고 예술적인 감각으로 인생을 보는 심미안적인 눈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목사님 기억나세요? 우리가 기숙사에서 살 때 어느날 목사님이 저를 목사님 기숙사 방으로 데리고 가서 화첩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목사님이 그린 많은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하얀 도화지에 검은색 선을 연필로 몇 개 그어놓고는 그게 머리카락을 그린 것 이라는 것 이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분은 나와는 다른 눈을 가지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목사님은 ‘라스베가스 예수’라는 책도 쓰셨지요. 그 책이 많이 팔렸으면 돈 좀 벌어서 라스베가스를 탈출하셨을 텐데 끝까지 라스베가스에서 사셨던 것을 보면 돈 버는 재주는 없었던 같습니다.
목사님은 저보다 연세가 많으셨는데 늘 소년처럼 사셨던 분이셨지요.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순진하고 깨끗했습니다. 죄악된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목사님을 좋아했었지요.
목사님은 노래도 잘 부르셨는데 특히 동기들이 부탁하면 서슴없이 부르시던 노래가 ‘봄비’ 라는 노래였습니다. 목사님이 템플시티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던 날 결혼식이 끝나고 이어진 피로연에서 클레어몬트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봄비”를 외치며 노래 부르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기타를 들고 그 노래를 부르셨지요. 그때 새색시인 사모님이 옆에서 눈치를 주시며 하지 말라고 하셨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그때 우리가 너무 짓궂게 굴어서 목사님, 사모님 미안합니다. 은퇴하면 서울 명동에 가서 기타치며 복음성가 부르면서 전도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하고 천국에 가셨네요. 우리가 라스베가스에 와서 함께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찰스턴 마운틴 에도 몇 번 갔었던 것 기억하세요? 가을에 단풍 보러 간적도 있고 여름에 거기가 시원하다고 해서 가기도 했었습니다. 라스베가스에는 구경거리가 여러 곳 있다고 가르쳐 주셔서 Red Rock Canyon 이나 Valley of Fire도 갔었지요.
특히 저를 데리고 뉴올린언스 호텔에 가서 크로피시(Craw Fish)를 먹었는데 그때 처음 그걸 먹고는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도 뷔페집에 가면 항상 크로피시 세 접시를 먹습니다. 불과 두달전 쯤 베가스에 와서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그게 목사님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좋은 음식을 사드렸으면 좋았을것을 말입니다. 집에 돌아오니까 목사님은 전화 하셔서 잘 도착했느냐고 물어보셨지요. 그리고 앞으로 더 자주 연락하며 지내자고 하셨는데 이제는 연락할 길이 없네요. 그래도 목사님 전화번호는 지우지 않으렵니다. 혹시라도 천국에서 목사님이 전화 하실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 중에는 좋은 기억을 남겨준 사람들이 있고 나쁜 기억을 남겨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쁜 기억이 없습니다. 목사님 성격이 순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이들과 항상 좋은 관계를 맺으셨고 목회 하시는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혼자서 묵묵히 감내하셨지요.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셔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고 연금도 제대로 못 넣으셔서 은퇴하신 후에도 연금도 너무 적고 소셜 시큐리티도 적어서 사모님이 아직도 일하시면서 고생하시고 계시는데 앞으로 사모님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시라고 그렇게 일찍 가셨습니까?
목사님,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살면서 고통을 받지 않으면 좋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남이 모르는 아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고통은 살며시 찿아 와서 우리에게 아픈 기억을 펼쳐놓고 갑니다. 그걸 하나하나 치워가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그러나 아픔은 우리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에게 치료를 줍니다. 하나님의 치료가 남겨진 가족들에게 함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아픔과 고통이 반복되는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인생의 종착역에 서있게 됩니다. 목사님도 그런 아픔과 고통을 안고 씨름하며 짧은 인생을 사셨을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지워버리고 천국에서 복된 삶을 누리시니 부럽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은 걱정 마세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다가 천국에서 만날테니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남기신 이 땅에서의 삶의 흔적들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지게 될 테니 목사님은 짧았지만 굵은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오히려 아직 이 땅에 남겨진 우리들을 불쌍하다고 내려다 보고 계실테니 나중에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천국에는 비가 오지 않을 테니 ‘봄비’ 노래를 불러도 아마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네요. 목사님의 천국입성,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