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중국선교사로 나가서 사역하다 별세하신 고 최 민 목사님은 한때 우리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 일한 분이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했다. 사역에 대한 열정도 많고 저서도 많이 남긴 귀한 분인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그 분은 중국 연변에서 대학까지 나왔지만 고향은 북한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시로 북한말이 튀어 나왔다. 무슨 신문사 행사를 진행할 때면 꼭 나한테 와서 물었다. “주석단엔 누가 앉게 됩니까?” 반공주의자인 나는 ‘주석’이란 말만 들어도 김일성 일가가 생각이 나서 최 목사님께 불쾌하게 쏴 붙이곤 했다. “아니 여기가 공산주의 나라에요? 주석단이라니! 주석단이 뭡니까?”
그때 나는 주석단이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회의를 할 때 그들의 ‘독재 왕초’가 앉는 자리가 주석단인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석단’이란 우리말로 ‘귀빈석’을 이르는 말이었다. 모든 행사에는 귀빈석이 있는 법이고 그래서 어느 자리에 귀빈을 앉혀야 되느냐고 물은 것인데 난 왜 그때 김일성이만 머리에 떠올렸을까? 북한말에 문맹이었던 내 무식의 소치였다. 그분에게 바가지로 퉁을 주면서 북한말에 그런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다.
난 요즘 북한말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북한에서는 다이어트를 ‘살까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도시락을 ‘곽밥’, 쥬스를 ‘단물’이라고 부른다. 서울대학출신을 S대학 출신으로 부르듯 김일성대학 출신을 ‘김대출신’으로 부른다. 김대출신하면 우선 북한에선 최고의 엘리트로 평가받는다.
내가 북한에 가본 적은 없다. 수년전 중국 도문에서 두만강 건너 빤히 보이는 북한 땅을 하염없이 쳐다본 적은 있어도, 그리고 무산광산으로 유명한 무산시를 압록강 건너편에서 도둑괭이처럼 살짝 건너다 본 적은 있어도 북한 땅을 직접 밟아보진 못했다.
그런 내가 북한말에 재미를 붙이게 된 이유는 현재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는 ‘사랑의 불시착’이란 연속극을 보면서부터다. 너무 재미있다. 그러다 보니 북한말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보노라면 영어자막이 나오기 때문에 레지던트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그 바쁜 우리 집 딸도 그 연속극에 빠져있는 중이다. 딸은 혼자서 2번씩 재탕해서 보고 있다.
이 드라마는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북한에 불시착한 재벌 상속녀 윤세리(손예진)와 북한 인민군 장교인 중대장 리정혁(현빈)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리정혁이 거주하는 ‘사택마을’ 사람들이 드라마의 감초다. 사택마을은 남한의 어느 동네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방과 후 아이들을 데리러가는 모습이나 숙제 하라고 다그치는 모습이 그렇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전이 되지만 쌀밥에 고기는 물론이고 한국화장품에 전기밥솥까지 남한과 다를 바 없는 여유 있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아! 이거 북한찬미가 아냐? 좌파 드라마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생기자 제작진은 처음부터 선언하고 나왔다. “본 드라마는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사건, 조직 및 배경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밝힙니다”란 자막이 초장부터 뜬다.
보통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하고 비겁한 이미지로 그려지던 북한군 장교에 미남 배우 현빈이 열연하고 그가 목숨을 걸고 남한 여자를 수호하는 모습에 한국의 여성 40대 시청률이 최고 16%까지 돌파하며 순식간에 ‘여심 저격 드라마’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일 없습니다”란 말이 나온다. 얼핏 들으면 싸가지 없게 들릴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이 말이 ‘괜찮습니다’란 말이다. 오히려 겸손의 말이다. 원피스는 ‘달린 옷’, 전구는 ‘불알’, 장인은 ‘가시아버지’라고 부른다. 콜라는 ‘코코아 탄산 단물’, 라면은 ‘꼬부랑국수’, 온천은 ‘더운물 미역’이라 부른다.
더 우스운 말도 있다. 삿대질을 ‘손가락 총질’, 나이프는 ‘밥상칼’, 햄버거는 ‘고기겹빵’이다.
우리에게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 언어와 외모도 같고 뿌리도 같지만 만날 수 없고 만나선 안되는 사람들이 사는, 그래서 이상하고 무섭고 신기한 나라다. 그래서 더 궁금한 나라.
그런데 이 드라마에 빠져들다 보니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거기에도 사랑과 연애가 있고 눈물과 우정, 의리가 있는 나라가 아닌가? 탈북자 출신 작가와 북한말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가며 만들었다니 픽션이라곤 하지만 완전 ‘공상소설’은 아닌 것 같다.
‘북한 미화’ 논란에도 불구하고 촌스럽지만 순수하고 정답게 느껴지는 북한말이 자꾸 내 입술을 자극하는 것은 웬일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한국의 좌파정권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내리 달려서 통일에 이르게 되면 제일 먼저 발생할 통일한국의 남북갈등문제는 ‘햄버거’가 표준어냐 아니면 ‘고기겹빵’이 표준어냐, 그걸로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지 않을까?
햄버거는 정작 미국산인데 남북한이 어느 말로 표준어를 삼을지 또 싸움을 벌인다면 통일 후가 더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