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Login    /   Logout
818.624.2190
설교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4/28/21
[초대강단] “사명–알고 가는 길”(사도행전 20장 17-24절)
전병욱(임마누엘연합감리교회 목사, 콜로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지금 삶을 보니까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다~” 이 말 들으면 어떠신가요? 그 말 듣고 기분 좋으신 분들 아마 없으실 겁니다.


인생을 표현할 때 길이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제자들이 걸어갔던 길.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어떤 길을 걸었느냐? 곧 어떤 삶을 살았느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한길은 고생하는 길이고 다른 한길은 평탄한 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답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단이 유혹하는 질문입니다. 길을 보여주면서 자갈밭 길과 평탄한 길… 길의 모습을 보여주고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그 질문이 유혹인가? 여러분 길의 용도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도로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도로에서 주무시나요? 도로에서 사시나요? 도로는 바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수단일 뿐입니다. 종착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끝에 영원한 죽음이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냐? 가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선택은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종착지에 대해 보여주십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인가? 아니면 구원으로 가는 길인가? 앞에 보기엔 너무나 좋고 넓은 길이지만 저 끝을 보니 어두컴컴한 길인가? 앞에 보기엔 너무나 높고 험하고 좁은 길이지만 저 끝에 분명하게 빛이 비치는 길인가?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러분,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화려하게 보이는 길로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저끝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결코 순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길인가.. 누가 봐도 고생길.. 그러나 그 길을 걸어 갈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우리를 도우시고, 주님이 우리와 한걸음 한걸음 동행하심을 경험합니다.


생명의 빛이 비치는 하늘로 향하는 길로 다시 한번 담대하게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의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초청해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는 구절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사도 바울도 에베소에 들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으로 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약 60마일 정도 떨어진 밀레도에 들어와서 에베소의 장로들만 따로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고 오늘 본문의 내용이 시작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에베소 근처까지 왔는데 왜 에베소에 들르지 않았을까? 단순히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려 했던 것으로 기록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의 의도적인 선택들이 발견됩니다. 인정받고, 대접받는 곳에 가지 않으려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만약 지금 이 소식을 에베소 교인 중 누군가가 알았다면 바울에게 참 서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에베소 옆인데… 우리가 보고 싶지 않으신건가?” 어떻게 보면 바울은 무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에베소에 안 갔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령님께서 가지 말라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이 참 많은데 주로 어떤 길을 걸었던 사람들인지 분명하게 구별이 됩니다. 바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성격 좋고, 아무리 인성이 좋아도 겨우 한줄 적힐까 말까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사명 감당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기록되고 삶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견되는 것은 순종이 곧 사명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그 다음에 사명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 자체가 곧 ‘사명감당’이라는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 삶에서 거창하고 누가봐도 드러나는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고 누가봐도 작은 것처럼 보이는 것부터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어떤 것일까요? 아마 여러분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거기에서부터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거창한 순종하기 위해서 기다리지 마시고 지금 바로 그것 여러분 마음 속에서 순종을 명하시는 곳에서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사명의 삶이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인생이 아니라 사명으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본문 18절 ~ 21절까지 보시면, 사도 바울 자신이 에베소에서 걸어온 사명의 길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제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사역했는지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겸손과 눈물과 유대인의 간계로 인해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아멘.


여러분들께서 바울의 사역의 여정을 보셨을 때 어떤 것들이 보이시나요? 사역의 여정이 어때 보이시나요? 바울이 지금 고백한 내용을 보면 참 사역의 여정이 힘들었다는 것이 보여 집니다. 마치 자랑할 것이 없고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저 고생만 한 사역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자로써 충분히 자랑스러워하고 자랑할만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에베소에서 기적과 이적이 일어났고, 수많은 제자들이 길러졌고 또 복음이 그 지역에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을까요? 왜 누가 들어도 “대단하네..” 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은 그것에 대한 것, 즉 누가봐도 자랑이 될만한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18~21절을 묵상하면서 바울이 이 고백을 할 때 목소리 톤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바울이 장로들에게 이 고백을 할 때 어떤 목소리 톤이었을까? 힘없이..“제가 고생 엄청하고… 힘들게 사역한 거 다 알지요? 힘들어도 주님 보면서 참고 사역한거 다 알지요… 제가 먹고 입을꺼 다 벌어서 사역했잖아요..” 하소연 하듯 고백했을까? 아니면 자랑스러워하면서 고백했을까? 저는 분명히 자랑스럽게 고백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겸손하게 눈물로 사역하고 시험을 참고 어디서든지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던 것에 대해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기적과 이적 그리고 성도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분은 좋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바울의 자랑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바울의 자랑은 자신이 복음 때문에 얼마나 큰 어려움과 아픔을 당했는지 얼마나 힘을 썼는지.. 였습니다.


바울은 사명이 어떤 길을 걸어가는 것인지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도 주님께 사명 받으신 분들임을 알고 계십니까? 아멘!(이럴 땐 그냥 아멘).


목사만 사명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멘 한다고 사명 있고, 안한다고 사명 없는 것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 사명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 앞에 서서 여러분의 사명을 돌아볼 때 무엇을 자랑하시길 원하십니까? 몇 명 전도되었다? 내가 섬겨서 부흥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은혜 받고 변화받았다? 만약 그렇다면 여전히 사명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명이 뭔지 아시는 분과 그렇지 못하는 분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여기서 나옵니다. 사명이 뭔지 아시는 분들은 분명히 어렵고 눈물이 있고 시험과 상처있는 것을 알지만 감당하시고, 사명이 뭔지 모르는 분들은 눈물 없고, 시험과 상처없는 사역만 감당 하려하고 찾습니다. 그런데 사명 감당하는 것에서 눈물을 피하려하고 시험과 상처를 피하려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명에 종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님의 일은 사명이고 그 사명은 눈물과 시험과 상처가 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누가 봐도 하찮은 일들 감당하지만 눈물과 시험과 상처를 이기고 감당하면 그것이 사명이고, 앞에 드러나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자리 같지만 눈물 없길 바라고, 시험 없기를 바라고, 상처없기를 바라면서 일하면 사명 감당하는 것 같지만 주님보시기엔 사명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복음 때문에 눈물 흘리고, 마음 조리고, 상처받고, 어려움 당했는가? 여러분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것은 바로 그 것 뿐입니다. 눈물, 시험, 상처… 여러분 이 부분들 다 있으실 것입니다. 봉사하면서 사역하면서 겸손하게 눈물 참고, 시험 견디고 상처가 있지만 그래도 사명 감당하려고 힘쓰고 애썼던 시간들… 여러분! 그걸 자랑하시기로 작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으로 가서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는 시간을 고백했다면 이제 자신의 사역이 어떤 사역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예측하고 있습니다. 22~23절 새 번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지금 나는 성령님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한가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서나 투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성령께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성령의 이끌림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고백하는데, 성령님께서 내가 너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께, 지켜줄 께.. 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감옥에 갖히고 오히려 더 힘들 것이라고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성령께서 가라하시니까…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순종함.

만약에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바울의 상황이었다면… 저 같으면 기도하면서 성령님께 좀 따졌을 것 같습니다. “성령님! 저 이제까지 죽어라 고생 만 했는데, 이제 예루살렘에서는 지켜 주셔야하는거 아닙니까? 예루살렘에서 만큼은 고생하는거 좀 없애 주시면 안됩니까? 그리고 성령님께서 가라하셨으면 최소한 먹고 사는 것 아니면 목숨을 보장해주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제가 간다고 했습니까? 성령님께서 보내셨잖아요! 책임져주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따졌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왜 안그러실 것처럼 표정이 그러신가요? 가만히 보면 바울은 이미 작정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저는 이 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지금 바울과 함께 있었던 장로들의 눈빛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 자기들은 예루살렘에 간다고 하면 감옥에 갖히고 고난을 당하고 죽을 수도 있으니 뜯어 말리려 왔는데, 감옥에 갖혀도 어려움을 당해도 간다그러니 놀라고, 또 얼마나 슬펐을까? 이제 바울의 모습도 목소리를 듣는 시간도,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곳에 장로들이 이런 단념을 했을 것입니다. “알고 가시는구나… 예루살렘에 알고 가시는구나… 고난 길 인걸 알고 가시는구나… 죽으러 가는 길 인것을 알고 가시는구나” 그러면서 그들의 눈에 바울을 통해서 누가 보였을까… 그 길을 이미 걸어가신 분이 계십니다. 죽는 길임을 이미 알고 순종함으로 사명감당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이미 알고 걸어가셨습니다.

도망 갈 수 있는 기회 얼마든지 있었고, 재판 중에도 풀려날 수 있는 기회 얼마든지 있었지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 사명임을 아시고, 순한 어린양처럼 화목제가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 그 길. 지금 사도 바울의 고백은 누가 하시는 고백일까… 저는 분명히 보여집니다.


바로 사도 바울 안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 혼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걷고 있는 사명의 길에서 무엇을 알고 또 기억해야할까요?


바로 사명의 길은 고생만 가득 차 보이는 길 같아 보이지만 사실 하늘의 은혜가 가득 채워진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것은 사명의 길은 결코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앞장서 가셨지만 결코 빨리 따라오라고 재촉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와 발맞추어 함께 걸어가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명 – 알고 가는 길.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고 하늘 은혜가 충만한 사명의 길. 그 길 온전히 감당하고 또 담대히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List   

크리스천 위클리
후원교회/기관
The Christian Weekly
621 S. VIRGIL AVE. #260
LOS ANGELES, CA 90005
TEL. 818.624.2190
Email. cweeklyusa@gmail.com
COPYRIGHT © 2015-2020 THE CHRISTIAN WEEKL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