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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6/08/22
[지상설교] 눈물의 의미(창세기 9:8-11, 마가복음 1:9-11)
권혁인(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 목사)

 

 노아의 홍수 사건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꼭 성경이 아니더라도 여러 곳에서 언급 될 만큼 옛날 이야기의 단골 소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더 논란의 대상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여부에 상관없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나 사건이 다 그렇지만, 홍수 사건도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초기 인류가 경험한 심판의 재앙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허구적 상상 속에서 전해 내려온 신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도 홍수의 심판이 주는 메시지의 의미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건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인지의 사실 여부에 더 초점을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여부에 상관없이, 대개의 사람들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지를 따지는 것에서 더 흥미를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불신자들이나 이를 증명해 보여줄 수 있는 물적 근거를 찾아다니는 신앙인 모두, 사실의 진위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물리적으로 사실 증명을 해야만 복음의 진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마치 보여주어야 사랑도 믿을 수 있다고 상대방이 졸라 대니까, 눈에 보이는 증거를 내밀려고 하는 치기 어린 모습과 유사합니다.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랑이 더 클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보여주려 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단번에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람의 판단만가지고 무한한 하나님의 뜻과 역사도 규정지으려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창조주를 좁은 인식의 틀 안에 가두려는 모습이나 다름 없는 꼴이지요. 이사야를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의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일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의 진위 여부를 통해서 모든 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하늘 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장벽만 쌓는 꼴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볼 수 없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태도는 애당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홍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만 받아 들이려는 태도도 자신이 믿는 바에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오만과 착각을 낳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노아 홍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한다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생명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부터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야 노아만 의인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 동물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생명을 잃어야 했던 걸까요? 요즘 동물애호가들이 들으면, 반발할 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를 내민다고 해서, 믿음이 생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너무 무자비하고 편향적인 것 아니냐며 반발만 살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 심판이라고 말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두려움에 떨며 죽지 않으려고 믿는 불편한 신앙이 되기 십상입니다. 이것까지도 감수한다 쳐도, 이와 유사한 자연적 재난이나 피해를 입을 때마다 모든 것이 다 불순종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월권행위에 가깝습니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생명이 어디 있으며, 그것을 판단할 기준이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자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타인의 고통과 피해를 불순종 때문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권한을 과연 누가 준 것입니까?

 

예수께서도 율법의 권위를 주장하며 외식하는 자들을 이렇게 다그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2-3).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일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대는 법입니다. 자신은 늘 문제가 없는데, 세상만 문제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불순종한 타인의 고통에는 잔인할 만큼 인정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변명도 많고 어떻게든 처벌을 피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자기 의에 가득 찬 사람들의 실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읽을 때 조차,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노아의 홍수 사건과 관련된 창세기의 기록은 대부분 방주의 제작 과정과 홍수 이후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판 그 자체에 대한 언급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일어난 사건이긴 하지만, 그 목적은 체벌 자체가 아니라 생명의 구원에 더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체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이야기라면 홍수 사건은 인간에게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체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교육을 주는 메시지라고 할만 하지요. 그러니까 홍수의 사건은 심판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통해 그 뜻을 되새기는 것에 더 초점을 두어서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종말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계시록을 읽는 관점도 죄의 처벌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장차 이루어질 종말의 심판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처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통해, 지금 우리 삶의 근원적인 방향과 목적을 재점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종말은 믿음을 잃어버린 불의한 이들에게는 심판의 날일지 몰라도,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말은 두려움으로 맞이해야 할 날이 아니라 소망으로 기다리는 기쁨의 날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바로 이 날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묻는 자세입니다. 예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복음을 선포하신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 우리가 해야 할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죽음을 선포하는 암울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생명의 소망을 알리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를 증명해 주는 표시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확증을 주신 것이지요. 생명에 대한 확고한 언약을 맺어 주신 것입니다. 홍수의 대재앙이 끝난 이후에 하나님은 언약의 증표를 노아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며 영원히 변함없는 언약이었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신 사랑의 서약이었던 셈입니다. 만일 홍수의 심판이 오직 처벌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이처럼 조건 없는 서약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홍수 이후의 세상도 그 전이나 별반 큰 차이가 없을 만큼 불의와 죄로 가득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변만 돌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완전한 의인처럼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있다 해도, 양심이 애초부터 없는 사람이거나 의인이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 믿고 신앙이 깊어진 것 같은 순간에도, 끊임없이 크고 작은 유혹에 흔들리거나 삶의 재난에 부딪혀 무너지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물론, 알 수 없는 불행과 아픔을 당할 때마다 행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벌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라도 자신을 돌아 보며, 반성의 기회를 갖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거나 과거에 얽매여 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응징하거나 처벌하려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과감히 탈바꿈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로 향해 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언제나 ‘바로 지금’ 그 일을 행하라고 부르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홍수의 이야기 대부분을 방주 제작에 할애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공간인 방주를 만들어서, 희망의 날을 예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의 방주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따라서 만드는 것에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아무 문제가 안 생기도록 해 줄 것이란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우리 앞에는 대홍수와 같이 거대한 위기가 삶을 가로 막을 수도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 방주를 만들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삶이란 게 원래 그런 모습인 걸 어떡하나요. 희노애락이 공존하며 굴곡진 삶을 이루어 가는 게 바로 우리의 인생이니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은 더 이상 생명을 멸할 시험은 주시지 않겠노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결코 홍수로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해 주신 것이지요. 이 말씀은 모든 짐을 우리에게만 지우는 일은 없을 것이란 약속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탓을 우리에게만 돌리지는 않을 것이란 말씀이지요. 우리 삶의 고단한 짐을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이 약속이 확증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한 바 있지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더 이상 모든 짐을 우리에게만 맡기셔서, 홍수에 쓸려 내려 가듯 감당 못할 시험을 주시지는 않을 것이란 고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홍수의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홍수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심판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향해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입니다. 어릴 적 말을 듣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혼난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나중에 들어 보니, 제가 독한 구석이 있어서 매를 맞아도 이를 악물고 눈물 한 방울 조차 흘리지 않더라는 겁니다. 어린 맘에도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매를 맞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인지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정작 눈물을 흘린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매를 맞고 잠든 아들을 보니까, 그게 더 안쓰러우셨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도 말 안 듣고 끝까지 버티는 아들에게 막상 회초리를 들었지만, 맞아서 상처가 난 다리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는 거에요. 상처는 아들의 다리에만 생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머니의 마음에도 깊게 남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자는 줄 알았던 제가 벌떡 일어나서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라고 용서를 구하며 울더라는 겁니다. 회초리는 이를 악물고 버티던 녀석이 어머니의 눈물에는 금방 손을 들고 만 것이지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에 보면, 주인공의 심장에 거울 파편이 박혀 얼음같이 차가워진 사람으로 변하는데, 결국 이를 녹여 없앤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눈물, 그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야말로 진정 사람을 살리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물은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눈물 안에 생명에 관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우리를 향한 회초리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흘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세례로부터 시작한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 찾습니다. 요한으로부터 받은 물세례는 홍수 사건 이후로 더 이상 우리를 홀로 남겨 두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물의 의미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요즘은 점차 눈물이 말라 가고 있는 시대라고 합니다. 으레 눈물바다가 되던 졸업식장에서 눈물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쿨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니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밀가루 범벅을 만들고 옷을 찢는 폭력적 행위가 더 익숙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헌데 눈물의 의미를 잊고 지내는 세대가 안게 될 역설적인 모순은 결국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눈물은 피눈물과 같은 고통의 눈물입니다. 부활의 여정을 지나며, 우리를 위해 흘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 그리고 우리와 맺은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재확인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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