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Login    /   Logout
818.624.2190
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1/15/23
[신년설교] 니고데모의 변신(요한 3:1-5)
이계준 목사(연세대 명예교수)


1.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3:1-5은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대화한 내용입니다. 니고데모란 이름은 “승리한 사람”이란 거창한 뜻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는 바리새파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인 동시에 유대의 최고 의회인 산혜드린 의원으로 당대 최고위층 인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야밤에 주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그리 대담하거나 자신만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주님을 찾아온 동기가 호기심이었는지 혹은 죄책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천박하기로 이름난 갈릴리 사람 예수를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에게는 겸손한 측면도 있는 듯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지체 높은 신분에 개의치 않으시고 “다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깨닫도록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일차원적인 질문만 남기고 사라집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이렇듯 동문서답이거나 우이독경(牛耳讀經)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서 무방할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장기인 따지거나 논쟁은 고사하고 유치한 질문만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얼빠진 속물에 대해 어떤 미련이나 관심도 갖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남긴 행적을 보면 그에게는 일대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속 깊이 꽂혔는지 혹은 어떤 연유로 변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다시 태어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7:25-52은 초막절을 맞이하여 유대 지도자들이 산혜드린에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정당한 심문 없이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역설한 사실을 전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9:38은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신 다음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아리마데 요셉과 함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갈보리 산에 있는 새 무덤에 주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대담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변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로마정권의 앞잡이이자 바리새파이고 산혜드린 의원인 그가 예수에 대한 흉계를 꾸미는 의회에서 자신이 한평생 쌓아 올린 스펙을 초개처럼 버리고 다가올 손실과 위기에 개의치 않는 정의의 대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암시하신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확신 가운데 세속주의의 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아리마데 요셉과 함께 주님의 시신을 매장하므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변신은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과 함께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하신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을 하느님 나라로 변혁하는 사도가 되었음을 함의하는 것입니다.


2. 니고데모의 변신이 새해를 맞이한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도전으로 다가왔으면 합니다. 해마다 지니는 소망이 허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공통적인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제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그리스도의 성숙한 모습에까지 진화하므로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개조하고 날마다 하늘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2000년 전 니고데모의 시대상과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떤 변화나 발전이 있습니까? 지난 100년 동안 인류가 이룩한 업적만 보더라도 실로 엄청난 발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경시대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거쳐 AI시대에 이르면서 삶의 양과 질은 인류역사상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및 도덕적 차원은 니고데모 시대와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후퇴하였다고 해서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곳곳마다 비합리적이고 무지막지한 불의와 부정, 위선과 독선, 공포와 죽음이란 죄악과 비극이 인간을 파괴하고 사회를 황폐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국대학 교수들이 올해 우리 사회상을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정했는데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10대 경제국이 되고 OECD 가운데 고등교육이 최고도에 달해도 정신적, 도덕적 변화는 요지부동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특히 권력자들과 지도층 인사들에 의해 자행되고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하여 청렴하다는 지식계층과 사회 인사들은 이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어떻습니까?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두 가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풍요에 대한 불감증인 얼마나 잘 사는지 모르는 동시에 안보에 대한 불감증인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더 보탠다면 도덕적 불감증으로 어떤 불의를 행하는지 또한 얼마나 불의한 사회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현실이 이렇듯 엄중하다면 거듭난 니고데모의 현대판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니고데모는 자기 지식만을 자랑하는 현학적 지식인도 아니고 세속적 금 권력을 휘두르는 안하무인도 아니며 더욱이 자기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영적 이기주의자나 자기도취자 narcissist도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거듭난 니고데모의 현대판 모습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으로 깨어나서 자기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진리와 정의의 대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양날의 검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좌우에 있는 불의를 일소하고 이로 인해 따라오는 불이익과 위협을 극복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 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은 성공보다 실패의 확률이 높은 것이 우리의 경험이고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의 종신교수인 로베르토 웅거 박사는 (R. Unger, The Religion of the Future)라는 그의 저서에서 고등 종교들의 비 사회성을 비판한 다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최고조로 발휘할 수 있는 유연한 사회가 곧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특히 기독교가 4세기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다음 16세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전적으로 무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이런 현실에 저항하고 이를 개조하기 위해 만인 사제론을 주장하였고 개신교가 이를 표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변화를 주도해야 할 세속적 사제인 평신도는 개인의 영적 생활에만 안주하였고 세속을 변혁하는 데는 무관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웅거 교수의 인간 중심적인 자유 사회가 곧 미래의 종교가 된다는 주장이나 개신교의 신앙이 개인적 및 영적 변화에만 머물고 사회 및 세속의 변혁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구 교회가 정의와 자유를 바탕으로 오늘의 복지사회 건설에 일조하였고 한국교회가 3.1운동과 근대화에 공헌한 역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속적 사제인 우리는 미약했던 신앙과 생활의 일치와 정의와 자유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 웅거 교수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베스트셀러 소설인 김호연 작 이 있습니다. 전직 교사이자 어느 교회 집사인 점주는 공간도 비좁고 상품도 다양하지 않은 불편한 편의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편의점이란 편의를 제공하는 곳인데 불편하다 보니 수익도 시원치 않아 연금으로 살면서 가계를 운영합니다. 특이한 것은 그녀는 알콜성 치매 환자와 범법한 전직 경찰관 등 사회적으로 폐기 처분된 소외자들을 야간 알바로 채용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듯 부실한 인간들이 치유되고 정상인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절과 봉사는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건달인 점주의 아들마저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작가의 문학적 의도와는 거리가 멀지 모르겠으나 설교자의 눈에 비친 이 소설의 초점은 거듭난 사람이란 과 같은 불의하고 불합리한 세상을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하느님 나라로 개조하는 주역임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나 한 사람의 거듭남과 작은 실천이 가정과 사회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바꿀 수 있다는 놀라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온 세상이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 니고데모처럼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존재로 변신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단시간이 아니라 한평생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면서 주어진 시대적 사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변신은 일상과 세상을 사랑과 평화가 가득 찬 하느님 나라로 바꾸고 날마다 하늘 잔치에 참여하며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 2023년 1월 15일(주일) 연세대학교회 주일 예배 설교입니다
List   
크리스천 위클리
후원교회/기관
The Christian Weekly
9925 Bothwell Rd.
Northridge, CA 91324
TEL. 818.624.2190
Email. cweeklyusa@gmail.com
COPYRIGHT © 2015-2020 THE CHRISTIAN WEEKL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