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호(연합선교교회 목사)
담임사역을 20년 가까이 하면서 늘 드리는 기도는 ‘주님, 제가 주님의 좋은 동역자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좋은 동역자를 저에게 보내어 주소서’ 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섬기고 세워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당신은, 주님의 좋은 동역자이십니까?
이 시간 저는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았던 바울, 그의 주변에는 여러 모습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바울은 기뻐하고, 슬퍼하였으며, 또한 울고, 웃었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살펴 보면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바울을 버린 동역자들
본문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생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반복된 그의 말은 그의 사역의 태도였고, 또한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쳐지고 보여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현재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노년에 옥중 생활을 하고 있던 바울에게는 함께 한 자들이 매우 적어졌습니다.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은 나를 버렸다’, ‘나는 버림받았다’ 동역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겁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불려지는 안타깝고 한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데마’입니다.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원래 데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그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몬 1:24 “...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여기서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로 불렸습니다. 그가 복음 사역 때문에 함께 환란을 겪었기 때문이죠. 그는 본래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3년 정도 지난 때인, 바울의 마지막 때에 가서는, ‘나를 버린 데마’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닙니다.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과 헌신마저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데마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가난, 억압, 조롱, 투옥 등 수많은 고난을 함께 당했던 것이죠.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잠잠히 있어 보았는데, 너무 편한 겁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예수 복음을 이야기 하지 않고, 세상 이야기만 하니까 욕 안먹고 주변 사람들과 즐기면서 지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 바울을 떠나서 데살로니가에 가보니 세계의 무역상들이 다 모이고 수많은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흥미롭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게 된 겁니다. 그것들을 보고 듣는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을 따라서 고생하며 사는 것이 지지리 궁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버리고 떠났던 겁니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있었을 때, 앞장 섰던 민족대표 33인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추천받고 세워질 만큼 애국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5년, 10년, 20년 30년 시간이 흘러도 해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33인 중에 3명은 결국 친일로 변절하였다고 합니다. 비슷한 상황이었겠죠.
여러분 중에는 주님의 동역자로서, 복음과 함께 맞이하게 되는 고난이 있습니까? 어떤 손해나 불편해하는 눈초리들이 싫어서, 요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약화되고, 흐려지고, 변질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근래 들어서, 언제 예수님, 십자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들에게 해 보셨습니까? 혹시 세상을 향해 눈길이 돌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데마의 배신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
이 글을 읽다보면, 동역자들에게서 버림받은 바울의 찢어지는 이 아픈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 주님의 눈물이 아니겠습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라고 했는데, 근래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식어져 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십시오. 요즘 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혹시 데마의 길을 걷고 있는 내가 발견된다면, 속히 주님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
딤후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2. 그런 중에도 바울에게는 그 아픔을 상쇄시키고, 다시 한번 더 소망을 갖게 만드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주의 동역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보고 싶은 아들 디모데
9절에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나를 버리지 않고, 존경해주며, 나를 아버지로 여기는 신앙의 아들’이었습니다. 사실 디모데는 몸도 연약하고, 아직 나이도 너무 젊어서 권위가 없어 보이는 약한 사역자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의 신실함, 변함없는 그 모습이 너무도 고맙고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었습니다.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이 되기 전에 오라’고 적혀있습니다.
“속히 오라”는 말은 바울의 긴급한 마음을 담은 말입니다. 그는 현재, 복음 전한다는 죄목으로 갇혀 있고, 심지어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습니다. 사형이 언제 실행될지 모르는 때였고, 또한 배가 움직일 수 없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바울은 더욱 급한 마음을 가졌던 겁니다. 이러한 때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 신실함, 변함없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연세드신 어느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힘도 돈도 능력도 없어요. 제가 목사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목사님이 앞에서 인도하실 때, 힘 나시라고 한자리라도 더 채우고, 함께 중보하려고 나오는 겁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그 자리에서 받은 은혜에 반응하고, 중보기도해 주시는 성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 권사님을 늘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사람, 주님의 동역자가 되십시오. 또한 목사인 제가 보고 싶어하는 동역자가 되어 주십시오.
2) 돌아온 동역자 마가
11절엔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적혀있습니다.
- 배신자 마가
마가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여러 번 언급됩니다. 우선 그는 풍부한 영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 현장을 목격한 자였고, 그의 집은 마지막 성만찬의 장소였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을 때 교우들이 기도했던 곳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적인 장소였습니다. 이른바 마가의 다락방이었죠. 그리고 마가는 그 유명한 바나바의 조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바울과 바나바의 첫번째 선교 여행에 동역자로 발탁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영적인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전도사역에서의 그의 모습은 ‘배신자’로 나타납니다.
행 13:13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보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마가)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차 선교팀은 소아시아의 내륙 중부 고원을 통과하는 험난한 길을 가는 도중에 마가는 이 두 지도자를 떠나 예루살렘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모두를 실망시킨 일이요, 선교팀에도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 일 때문에 바울의 2차 전도여행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마가에게 한 번 더 사역의 기회를 주자는 바나바의 의견에 맞선 바울은, 마가는 또 다시 배신할 것이라며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났던 겁니다. 지도자들의 갈등과 분열의 단초가 된 것이 바로 마가요한이었습니다.
-동역자 마가
그랬던 마가는 변합니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몬 1:24엔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쓰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바울은 마가와 함께 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나중에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었던 겁니다.
-유익한 동역자
딤후 4:11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최후의 장소, 로마 사역에 마가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
시간이 지난 후에 마가는 사역 중에 무책임하게 도망가는 그런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바울에게 꼭 필요한 동역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돌아온 마가는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주님을 가슴 아프게 했다면, 이제는 돌이켜서 주님의 동역자요, 더 나아가 주의 일에 유익한 동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충성된 동역자 누가
11절에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점을 돌봐주는 동역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골4:14)고 말합니다.
누가는 이방인 출신으로 교육을 잘 받은 의사였고, 바울의 2차 전도여행부터 동행했던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누가는 당시로도 의사로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 바울이 가는 곳마다 동행하였고, 바울의 건강을 관리해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바울의 연약성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바울 역시 사람인데, 시험들게 하는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점을 돌봐주고 고쳐주고 가려주는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자신이 ‘사단의 가시’라고 부르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기도로 병자들을 고쳐주고 살려주는데, 자기 몸에는 도대체 낫지 않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가 세 번 작정 기도 후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냥 끌어안고 살았던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안질이나 간질이라고 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는데, 어떤 것이었든지, 바울은 그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그것은 사단의 가시로 여겨질 정도로 바울의 약점이었습니다. 그의 이 약한 곳을 돌보고 고치고 가려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의사 누가였던 것이죠.
- 변함없이 충성하는 누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누가는 숱한 고난에 이어 동역자들이 다 떠나는 상황에서도, 바울이 낙망치 않도록 그의 위로자가 되어 주고 옆에 있었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바울과 함께 복음전도 사역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바울을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그 충성된 누가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를 기록하는 특권을 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동역자는 교회의 약점, 지도자의 약점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돌봐주고 조용히 자신이 책임지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더 크고 비밀한 것을 보이실 겁니다.
3. 결론
여러분은 주님의 어떤 동역자로 여겨지기를 원하십니까? 바라기는 디모데와 같이 주님이 보고 싶어하시는 동역자가 되십시오. 마가와 같이 전에 넘어졌었더라도 이제는 돌아와서 유익한 동역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누가와 같이 변함없이 충성된 동역자가 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에게 주의 일을 맡기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
김종호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서울신학대학원 졸업(M.Div), 풀러신학대학원(D.Min) 수료
-미주성결교회 총회 서기
-귀납법적 성경연구 강사
-코리아시니어커뮤니티센터 힐링상담 강사
-현 연합선교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