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구(남부플로리다감리교회 목사)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이 먼 염려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고 했는데, 세상에 근심 없이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권력자보다 근심이 인간을 더 많이 지배하고 있다는 말도 하는 것입니다. 이들 말처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근심도 근심나름 이라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인지 그 전형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바사의 수산 궁에서 술맡은 관원으로 이었으나 그의 원래 신분은 볼모였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벽이 이방에 의해 훼파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근심할 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은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벽재건에 나서고 싶었으나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조국과 민족을 위해 근심하며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1:4). 하나님은 그가 이런 마음으로 구하자 성벽재건에 직접 나서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느헤미야의 입장에서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다시 온 맘을 다해 보다 구체적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벽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오직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에 달린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이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 중국에서 선교를 하였던 허드슨 테일러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복음이 좀처럼 들어가기 어려운 중국대륙에 가장 성공적으로 복음전한 선교사로 유명합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어을 때마다 그가 한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나는 사역 할 때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움직이시도록 먼저 기도하며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가 민족이 겪는 아픔을 보고 탄식하며 기도하자 왕으로 하여금 느헤미야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께 술을 올리기 위해 왕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의 얼굴빛이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왕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다만 수척해진 아들을 보고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 순간을 위해 느헤미야는 금식기도 후 4개월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놓칠새라 자기의 소원을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느2:4,5). 느헤미야는 그 경황 중에도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먼저 아뢰고 지혜를 얻어 왕께 대답한 것입니다.
많은 뇌 과학자들이 인간의 반복되는 경험은 뇌의 어느 한 부분에 입력 저장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상황에서 자동 반응하는 효력을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반복된 습관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 듯합니다. 이처럼 기도생활이 습관화 된 사람은 기도가 필요한 상황에 이르면 반사적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느혜미야는 타국에서 볼모로 살고 있었지만, 늘 기도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에 이 결정적인 순간에도 경망스럽게 나서지 않고, 잠시 묵도하며 하나님께 먼저 묻고 왕에게 소원을 아뢸 수 있었고, 마침내 왕의 재가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벽 재건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