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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9/12/23
크리스천 행복 담론
이상명(미주 장신대 총장)

 

이 땅에 태어나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생각하며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현대인들은 행복을 수치로 매길 수 있고 자판기에 동전 넣고 커피를 사듯이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한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행복은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의 유형도 다르고 행복을 느끼는 정도도 다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추상적 가치여서 그 정체가 늘 모호하다. 누구나 행복을 말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고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행복’이라는 단어의 이력서

 

‘행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 ‘해피니스(happiness)’는 그 어원이 ‘일어나다(happen)’에서 파생된다. 이것으로 행복이란 원래 인간 스스로 통제하거나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기회와 행운을 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들조차도 행복을 자신들 마음대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와 행운을 관장하는 여신 포르투나(Fortuna)의 손 안에 놓여 있는 천상의 속성을 띤다. 이러한 행복 이해는 고대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천상의 것에서 지상의 것으로 그 행복의 의미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지상의 것으로서 누구나 노력 여하에 따라 성취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개념은 그 역사가 의외로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18세기 말 영국의 법학자이자 공리주의 철학자였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em)의 유명한 명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기원된다. ‘최대 행복’이라는 표현에서 벤담은 ‘행복’을 ‘쾌락’과 동일한 의미로 치환한다. 고대적 의미의 행운 대신, 쾌락을 행복으로 이해한 벤담의 의미 전환은 당시로서는 낯선 것이다.

 

따라서 벤담에 따르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추구에 있는 셈이다. 벤담이 남긴 영향은 우선 행복을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행복의 양화(量化)다. 그러나 행복의 기준이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른데, 길이와 무게를 한가지 단위로 통일해 계산할 수 없듯이, 모든 행복을 수치로 계산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주택 평수와 통장 잔고와 은퇴 연금의 액수로 과연 행복을 잴 수 있는가? 행복을 최대 다수에만 맞추어 가늠한다면 소수의 행복이 설 자리는 잃게 된다. 다수의 횡포로 인해 정의의 문제가 자연스레 발생하게 된다.

 

 

크리스천 행복 기준

 

우리 크리스천이나 크리스천 공동체가 누리는 행복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가? 사적 이익과 쾌락 추구 위에 행복의 토대를 쌓는 것은 분명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매력적인 명제이긴 하지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비유와는 공명되지 않는다.

 

크리스천 행복은 탐욕과 이기주의를 연료 삼아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크리스천의 행복은 우선은 ‘엔 크리스토’, 즉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다. 행복의 원천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전 8:9). 참된 쉼(마 11:28)도 평안(요 14:27)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은 그분과의 관계적 영성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이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와 그 닮음을 우리 일상 안에서 늘 지향함을 의미한다. 그분과의 관계 맺음은 우리의 인격과 생명이 싹 틔우는 원천이다. 관계의 단절은 장애와 죽음이고 이어짐은 회복과 생명이다.

 

두 번째는 자족(自足)의 원리다(빌 4:11). 하버드대학교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 다니엘 길버트(Daniel Gilbert)는 우리가 행복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욕심을 욕심으로 채우려는 한 행복 지수가 아닌 불행 지수만 상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들을 섬기는 태도에서 행복은 싹튼다. 행복이란 개인적 차원도 있지만 사회적 차원도 있다. 축적된 자본이 사회적으로 적절히 배분되어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도 행복을 누릴 때, 행복한 공동체가 조성된다. 친히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 속에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자라는 진정한 행복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크리스천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눔과 돌봄과 섬김 위에서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며 공동체 바깥 사회와 그것을 공유하려 애쓰면서 ‘그리스도 안’의 외연을 확대하는 공동체다.

 

탐욕의 문화에 찌든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의 원리로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세속적 행복으로부터 크리스천의 행복을 가름하는 기준이면서 크리스천 됨의 정체성을 식별하는 바로미터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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