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일(우드랜드힐스연합감리교회 목사)
New York City에 가면 Broadway 길에 두 개의 신학교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개신교의 진보적 신학교 Union Theological Seminary이고 또 하나는 유대교의 보수적 신학교 Jewish Theological Seminary입니다. 유니온 신학교에서 나와 유대교 신학교로 들어가다 보면, 입구에 학교 로고가 보입니다. 그 로고는 “불타는 떨기나무”입니다. 거기 성경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붸하써네 에네누 욱칼”(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 떨기나무가 유대인 랍비들을 길러내는 학교 정문에 새겨져 있습니다. 오랜 역사에 걸쳐 고난 당하고 학살당한 백성이 그 신학교 입구에 걸어놓는 로고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이 붙었으나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유대인들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지 석 달 되었을 때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 강에 띄워진 아기는 그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바로의 딸이 이 아기를 발견하고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애굽의 궁에서 길렀습니다. 유모가 된 모세의 어머니가 남몰래 히브리 노래를 불러주고 히브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모세”라는 이름이 히브리 말로 ‘건져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가르쳐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노래를 배우고 애굽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애굽 말로 ‘아들, 아이, 태어난 자’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로의 딸은 모세를 자기 아들로 삼았습니다.
장성한 모세가 하루는 히브리 사람들이 고되게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출 2:11).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며 못살게 구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모래에 묻었습니다. 이 일이 알려져 바로가 자기를 죽이려고 찾는다는 것을 알고,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거기서도 남 괴롭히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이고 있는데, 목자들이 그들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모세가 보고 그들을 도와 물을 먹이게 합니다(출 2:17). 이 일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 집에서 양을 치면서 삽니다. 그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게르솜”이라 짓습니다(출 2:22).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며 자기 형편을 돌아보며 지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어느 날 광야 서쪽으로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 모세가 이상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금방 타서 없어질 것 같은데 떨기나무가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어떻게 된 것인지 보겠다면서 모세가 다가가는데, 떨기나무에 붙은 불 가운데서 소리가 들립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거룩한 존재 앞에 함부로 가까이하다가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환영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영접하십니다. 모세는 이제 객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맞이하시는 손님이 되고 있습니다.
떨기나무 불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좋은 소식이고, 하나는 두려운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소식은 듣고 두려운 소식은 버리고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같이 들어야 합니다.
먼저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것은 구약성서의 복음입니다. “내가”(하나님이) 보고, 듣고, 알고, 내려가고, 건져내고, 인도하고, 데려 가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출 2:23-25). 산파들에게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하고, 백성에게 태어난 사내아기는 나일 강에 던지라고 하는 불의한 땅,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땅에서 건져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기뻐할 일입니다. 모세도 히브리 백성이 고되게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출 2:11-12). 목자들에게 시달리는 여자들을 도와주었습니다(2:16-20). 모세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가볍게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불의한 일을 바로잡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와 구원하시니 이제는 히브리 백성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모세도 식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40년이 지나도 이방 땅은 이방 땅이었습니다. 고국을 떠나 멀리 와서 사는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에서 하시는 하나님 말씀은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그 근심을 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서로 신뢰합니다. 하나님이 히브리 백성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은 거기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도 않습니다. 백성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고통을 아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내가 그 근심을 안다”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집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9-10절). 하나님의 이 말씀은 ‘편안하게 하는 말씀, 위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내 백성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낼 텐데, 그러기 위해서 너를 애굽으로 데려간다고, 너를 바로 앞에 세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모세가 탄식합니다. 하나님,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정말 자기가 누구인지 혼돈스러웠을 것입니다. 종살이하는 히브리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고 히브리 백성을 탄압하는 바로의 딸과 함께 살았습니다.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애굽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같은 히브리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히브리 사람인가? 애굽 사람인가? 애굽에서 도망쳐 지금은 미디안 땅에서 양을 치며 삽니다.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도 낳았습니다. 이제는 미디안 사람인가? 굴곡 많은 시절을 거쳐 이제는 잘 정착했습니다. 부인도 있고 아이도 있고 할 일도 있고, 장인 이드로 그늘에서 그런 대로 편안히 지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애굽의 바로로부터 히브리 백성을 이끌어내나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실 때 자신이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했습니다. 염려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확신을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두려워 말라 내가 함께 하겠다’고 하는데도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도, 모세는 또 묻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더 알아야겠다고 주님의 이름을 알아야 되겠다고 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지만, 이것이 정확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히브리 말로는 “에흐예 아세르 에흐에”입니다. 이상하고 신비로운 이름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번역하는 사람만 모르는 게 아닙니다. 언어학자든지 성서학자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여러 가지 추측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나는 장차 될 내가 될 것이다”(I will be who I will be), “나는 견디는 자다”(I am he who endures), “나는 있게 하는 나다”(He who brings things into being). 온갖 추측이 다 나옵니다.
분명히 옮기지 못해도 그 뜻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든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신다고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든지, 모든 것의 근원을 말하든지, 모든 일의 섭리를 말하든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는 이 세상에 혹은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이 계시고 견디시고 함께 계실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그 어떤 거친 일 험한 일이 벌어지든지, 고난의 골짜기나 재앙의 물이 얼마나 깊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래도 모세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손을 품에 넣으니 손에 나병이 생기고, 그 손을 다시 품에 넣으니 본래의 살이 돌아옵니다(4:1-8). 이 두 이적을 믿지 않으면 나일 강 물을 떠다 땅에 부으면 그 물이 피가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4:9). 모세는 그래도 계속 가지 못하겠다고 핑계를 댑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4:10-12). 모세는 끝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모세를 대신하여 말하도록 아론을 준비하셨다고 하십니다(4:13-17).
모세가 계속 못한다고 합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주신 사명은 너무 크다고 합니다. 모세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실랑이를 합니다. ‘그냥 주일날만 조금 예수님 제자 노릇을 하겠습니다.’ ‘제가 나서야 되나요?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었다고?’ ‘굳이 제가 나서야 되나요? 제가 교회 다닌 지 39년이나 되었는데요.’ 약속의 말씀은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 따라오는 책임은 싫습니다.
문제가 생길 것 같다 싶으면 펄쩍 뜁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그냥 이 광야에 있는 게 좋겠어요.’ ‘이 자연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며 살겠어요.’ ‘그냥 예배당 의자 넷째 줄에 앉아서 찬송이나 부르고 있겠어요.’ 산 위에 올라간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냥 여기 산 위에 있는 게 좋아요. 내려가지 않으면 좋겠어요. 초막 셋을 짓고. 예수님 변화된 모습 보고. 모세 엘리야 만나고. 산 아래 내려가 간질하는 아이 만나고 싶지 않아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십자가에 달리고, 싫어요.’
불이 있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주인이 종을 부르듯이 불러 일을 맡기는 것처럼 하지 않으십니다. 대화하십니다. 토론하고 논의하십니다. 존중하면서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물을 때마다 하나하나 대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을 세워주십니다.
우리의 물음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개 두려워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는 아이라 말할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렘 1장).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사 6장).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 나선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는 물러섭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는 우리도 두려워합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우리는 못할 것 같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바로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물음이 떠오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떠올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부르심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바로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다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내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물을 때 우리가 우리 삶의 바른 길을 얻고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얼마나 신실한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을 때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