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Login    /   Logout
818.624.2190
설교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10/08/23
[지상설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립보서 2:1-5)
이계준(감리교 원로목사, 연세대 명예교수)

 

 1. 저는 근자에 <전쟁과 같은 맛> Tastes like War이란 책을 읽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저자는 미국 뉴욕 시립 스탠튼아일랜드 대학의 사회 인류학 교수인 그레이스 M. 조 박사인데 자기 어머니의 조현병 schizophrenia의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한 전기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당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하였고 6.25 전쟁 중에 가족 부양을 위해 양공주가 되었다가 선원인 미국 남성과 결혼하고 American dream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에 이민 갔습니다. 조 교수는 어머니의 조현병 원인이 일본에서 받은 학대, 양공주로서 당한 천대, 미국의 인종차별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현대 역사인 일제 강점기, 6.25 전쟁, 군사독재 및 급격한 사회변화를 거치면서 겪은 불안과 공포, 경쟁과 갈등, 소외와 무관심, 억압과 착취 등이 남긴 트라우마가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에 전염병처럼 번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0세기 개발도상국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로 OECD 중 대학졸업자가 가장 많고 K 문화가 지구촌을 춤추게 하며 3대 고등종교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등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자살과 불행 지수가 OECD 중 최고이고 생명의 경시와 묻지마 살인, 사회 지도층의 위선과 기만, 양심 잃은 법정과 이념 내전의 첨예화 등으로 우리 사회는 정신적 공황과 비도덕의 불랙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막장 드라마는 아마도 인류역사상 처음일지 싶습니다.

 

2. 한국사학자들은 우리의 현실을 조선조 말기의 위기상태와 흡사하다고 보는가 하면 한 원로 사회학자는 시대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한국지성의 몰락”을 고발했습니다. 회고하면 구제 불능의 암울한 상황에서 희망의 빛을 밝힌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1885년 언더우드 박사와 아펜젤러 박사를 필두로 한 서구 선교사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망국의 현실에서 절망 속에 헤매는 민초들에게 희망의 씨를 뿌리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미국 학자의 말처럼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 및 기독교를 융합한 아시아의 유일한 나라가 되게 한 뿌리입니다.” 그들이 희생적으로 뿌린 씨앗은 다름 아닌 기독교 진리의 두 기둥인 성육신과 십자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면서 그 증거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시적으로 읊었습니다. 줄여서 말씀드린다면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전파한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겸손과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존재 이유와 가치이고 개인 및 사회의 정신적 공황상태와 부 도덕적 행태를 구원할 등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 복음의 생동성과 역동성에 따라 그 진위 여부가 판명될 것입니다.

 

3. 고 이어령 교수는 그의 마지막 저서 <Memento Mori>에서 “한국 기독교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쇠퇴해가고 불신받고 있으나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을 극복했던 그 힘을 되살린다면 새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이고 초기 선교사들이 체현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결별하였으나 이를 회복하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주의와 권위주의에 빠진 교회는 대부분 거듭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원초적 가치와 사명을 회복하기는 요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배신한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에 이르렀을 때 주님을 절대 신뢰하는 남은 사람들을(사 10:20)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참 복음의 DNA를 물려받은 남은 사람들 곧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진리와 자유로 단련된 우리 연세인들을 일꾼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겸손과 사랑으로 무장한 우리는 시대적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복음의 사도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동양 사상에서 공자는 겸손을 심재(心齋) 곧 “마음을 굶기는 것”, 장자는 오상아(吾喪我) 곧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의 욕심이나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고 빈 마음을 지니므로 도(道)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은 하느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섭리를 성취하려고 자기를 낮추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과 하나가 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일상에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그것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웃을 섬기며 이웃과 공존하고 윈윈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혼란과 도덕적 해이가 창궐한 무법천지에서 우리의 겸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인간의 지혜와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마리아 찬가”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권능으로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다. 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자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다”(1:51-53).


현대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오늘날 독재자나 전체주의의 폭력에 대해 즉각 저항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으나 그것은 기독교의 유산이고 성령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만이 무고하게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을 힘입어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는 세상의 권세를 겸손하게 만들 수 있음을 확신하고 용기백배하여 자기 겸손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요한 기자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세상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2대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하셨고 “네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A. 토인비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고 말한 것은 적절한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성서가 기록된 그리스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말이 셋인데 욕망의 사랑 eros, 우정의 사랑 philia, 성서에만 있는 자기희생적 사랑 agape 입니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뿐이어서 “사랑” 하면 그것이 연애인지 우정인지 자기희생인지 아리송합니다. 따라서 믿음에 전력투구하는 한국 교인들의 사랑은 말 잔치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바울의 말처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밝힘으로 그리스도의 성숙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엡 4:15).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가족을 잃은 포스트모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추상적 사랑 대신에 구체적 사랑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그분의 모습대로 조형된 인간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1서 기자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고 한 말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아가페 사랑의 표상은 아마도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양자로 삼으신 손양원 목사일 것입니다. 그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책임을 하느님께 떠넘기지 아니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므로 구원의 메시아로 승격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므로 참 크리스천 곧 예수와 같은 존재가 될 때 우리를 통해 발현되는 아가페 사랑만이 정신적 혼돈과 윤리적 난맥상을 치유하는 “사랑의 묘약”이 될 것입니다.


스위스 신학자 E. 부르너는 사랑의 사회적 차원은 정의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정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세례를 받은 정의는 징벌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를 넘어 천부적 정의 곧 인간의 인간화와 자연보존 및 기후변화에 대처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정의를 가슴에 안고 각기 일상의 자리에서 조직과 문화, 법과 제도를 통해 갈라지고 망가진 이웃과 자연을 회복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 곧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말씀을 실현하는 길입니다.

 

친애하는 연세 동문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이 50년, 100년 후에 어떤 열매를 맺을지 아무도 예견하거나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그의 부르심에 응답한 남은 자들을 통해 이루시는 일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복음의 작은 씨앗이 무악의 골짜기에 떨어진 지 100여 년이 지나 오늘의 연세라는 위대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일삼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비록 미약해 보이나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역사창조의 씨알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 설교는 지난 10월 5일 연세대 조찬기도회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List   
크리스천 위클리
후원교회/기관
The Christian Weekly
9925 Bothwell Rd.
Northridge, CA 91324
TEL. 818.624.2190
Email. cweeklyusa@gmail.com
COPYRIGHT © 2015-2023 THE CHRISTIAN WEEKL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