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병욱(덴버 임마누엘교회 목사)
한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름입니다. 애완동물 이름 하나 짓는 것도 몇일이 걸리는데, 사람의 이름 짓는 것은 더 신중합니다. 그래서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그냥 쉽게 결정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면서 가장 처음 듣는 것이 바로 이름이고,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것도 이름이고, 또 죽어서 유일하게 남기고 가는 것도 바로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으로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름이 참 중요합니다.
평생을 살면서 사람은 보통 세가지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먼저 자신의 이름. 그리고 저희 어머니께서 제 이름보다는 이렇게 많이 부르셨습니다. “아들” 그런데 제 아들[예호]이 태어나고 저를 “아들” 부르지 않고, “예호 아빠”로 부르십니다. 장모님께서 저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들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전 서방”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저의 자녀들은 저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아빠”
이처럼 저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살아가는데,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한 이름들을 갖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요? 저는 우리의 공통점을 찾으면 그곳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 = 바로 예수님의 사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인데, 그 이름으로 누리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오래전에 보았던 인상깊은 기사가 있습니다. 뉴욕시티에서 그냥 주운 쓰레기를 닦지도 않고, 그냥 손으로 주운 깡통 영수증 과자봉지 등을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포장해서 50불에 인터넷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뉴스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랍고 황당한 것은 그 쓰레기 박스가 해외 30개국에 1400개가 팔렸다고 합니다. 파는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사는 사람은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1400개의 쓰레기 박스를 구입한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그 쓰레기를 샀을까요? “뉴욕시티(NEW YORK CITY)”라는 이름보고 그 포장된 쓰레기를 샀습니다. 왜일까? 그 이름에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쓰레기도 “뉴욕시티(NEW YORK CITY)” 라는 이름 하나 붙이니까 더이상 쓰레기가 아니라 가치 있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냥 쓰레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린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가치 없이 여겨지고 버려진 삶이 귀하신 이름으로 가치 있고 귀한 삶으로 완전히 변화된 은혜.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인해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지는 삶. ‘예수님’이라는 성령의 인치심의 스티커 하나 붙여지면 어떤 인생도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사는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말씀 구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 7-9절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죽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 이라 말씀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것의 목적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사는 것.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무너집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잘 아는데,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아… 알겠는데, 그렇게 살기가 너무 힘들다…” 물론 이런 하소연은 그냥 하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려우면 쉽지 않으시면 안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힘들면 포기하실 겁니까? 그대로 하나님께 가면 “그래 내가 너 사정 다 안다… 그렇지 못할 수도 있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사정을 좀 봐주실까요?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질문 드리면 정답은 잘 아실 겁니다. 질문을 이렇게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은 언제 가능할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좀 더 벌면 가능할 것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더 생기면 가능할 것이다. 사회적으로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에 있으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돈을 모으고 더 모아도 왜 이리 부족한지 돈을 좀 모았다고 하면 왜 주님을 멀리하는지, 시간이 많은 것 같아도 왜 기도할 시간은 없고 말씀 읽을 시간은 없는지,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수록 왜 주님이 아니라 내가 높아지려고 하는지… 우리는 주변에 혹은 나의 모습을 쉽지 않게 발견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높이는 삶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답이 사도 바울의 자랑을 통해 분명히 발견합니다.
한번은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교회에 대해서 목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 벌써 10년이 지나갔어. 은혜로 했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회 하면서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들이 뭐가 있었어?” 그 물음에 제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제 성격도 본래 뭘 자랑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 자랑으로 삼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저녁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제 스스로도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돌아보면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계속 그 질문만 입에서 되새기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 그러면서 이상하게 대화는 흐지부지 마무리가 되었고, 저는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서 그동안 목회에서 자랑스럽고 보람된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회에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일을 생각할 때 저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이 늘었지? 제자훈련은 몇 명이 받았지? 성도님들의 삶이 얼마나 변했지? 교회는 얼마나 안정이 되었지? 재정은?”
누구에게 말했을 때, 사람들이 인정 할 만한 일들에 대해서 지난 일들을 뒤적이고 있는 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저의 머릿속에서 주님께서 책망하시는 듯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게 자랑이냐? 자랑거리가 아닌 것을 붙잡고 자랑하려 하느냐?!” 그때 제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진짜 자랑스러워 해야 할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있구나 …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무엇을 자랑했는지가 생각났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사도 바울이 무엇을 자랑했나요? 자기가 얼마나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시켰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몇 명을 주님께 인도했는지 숫자를 세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사역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또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그것에 대해서 한번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을 주의하고 세상적인 자랑거리는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했던 것은 얼마나 복음을 위해 옥에 갇혔었는지, 얼마나 주를 위해 매를 맞았는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얼마나 복음을 위해 굶고, 춥고, 헐벗었는지, 얼마나 교회를 위해서 잠을 못 잘 정도로 눈물로 기도 했는지를 자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무슨 자랑이야… 부끄러워서 숨겨야 할 일들이지…”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은 내가 약할 때 그리고 내가 죽었음을 고백할 때 높여진다는 것, 저에게 그제서야 그게 보였습니다. 제가 그걸 몰랐을까요? 수없이 말하고 설교도 했는데, 정작 저의 눈은 세상적인 자랑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영적인 눈이 뜨이니까… 자랑할 것이 많은 겁니다. “주님께서 아내를 통해서 나에게 질문하셨구나. 내가 무엇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셨구나…”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주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너의 자랑으로 삼고 있느냐?”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랑할 것은 얼마나 누렸는지 얼마나 잘 살았는지가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했는지, 교회를 위해 형제, 자매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는지, 마음 아파하며 좌절하고 절망했는지…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내가 부족할 때 풍족함이라… 내가 약해야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임을 알 수 있고, 내가 부족해야 풍성히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 그런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입니다.
꼭 강함과 풍성함만이 아니라 약함과 부족함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꼭 편안과 안정함이 아니라 아픔과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꼭 기쁨과 감사가 아니라 눈물과 절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날마다 새 힘을 주시고 또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3절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따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의 말씀! 이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들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이름을 높이는 삶, 아름다운 삶,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