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순(델라웨어한인연합감리교회 사모)
몇일 전 제 생일날에 정사모님께서 축하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감사를 드리며 정 목사님의 안부를 여쭈었더니, 사모님의 대답에서 목사님 건강이 약간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 목사님을 생각하면 저에게는 감신의 대 선배이기도 하지만, 친정 아버지 같은 어른이셨습니다. 저희가 30년 전에 클레어몬트로 유학을 와서 이틀 후에 예배를 드리러 찾아 갔던 교회가 시온교회였고, 그때 정 목사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시온 교회에서 함께 사역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었지만, 미국 생활, 이민 교회의 어색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저희들을 가족처럼 살뜰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하루는 기숙사에 살던 저희가정에 심방을 오셨었는데, 그 때 제가 음식을 잘 하면 얼마나 잘했었겠습니까만, 정 목사님은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하시며 최고 맛있는 점심이었노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말에 교회를 가면, 주중에 샌페드로 항구에 가서 잡아온 생선이라면서 유학생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하시며 냉동시킨 생선들을 잔뜩 싸주셔서 이름도 모를 생선들을 기숙사에 사는 모든 한국학생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넘치게 싸주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은 그라지 세일에 가시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지나 다니시다가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이것저것 사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시 나눠주시곤 하셨습니다.
한번은 작은 첼로가 눈에 띄어서 그것을 사다가 사모님에게 첼로를 배우라고 주셨는데, 그것이 아이들 사이즈여서 그 첼로는 우리 작은 아이에게로 왔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이가 고등학교 때까지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 부흥회가 있는 토요일이면, 멀리 한시간이 넘게 클레어몬트까지 갔다가 다시 주일 일찍 교회에 오느라 애쓰지 말고, 사택에서 자고 주일을 지키고 가라며 선뜻 목사님 댁으로 불러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 특히 시온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셨던 목사님, 교회를 건축하고 그 건축비 때문에 당신의 몸이 두개라면 그것이라도 팔아서 드리고 싶다 할 정도로 목사님은 시온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교회 정원을 사시사철 꽃이 피는 천국의 정원처럼 아름답게 꾸며놓으셔서 이민 생활에 지친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예배를 드리고 마음과 몸을 푹 쉬고 갈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산세가 아름다운 베어 마운틴에 기도원까지 마련하셔서 성도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마음껏 기도하고, 사시사철 바뀌는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쉬며, 하나님을 마음껏 숨쉴 수 있는 기회도 많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희는 공부를 다 끝내고 목회를 위해 캘리포니아를 떠났고, 목사님의 근황을 소식으로만 듣다가 몇 년 전에 저희가 사는 곳을 방문하셨습니다. 2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었지만, 목사님은 우리 집에서 묵으시며 마치 결혼한 딸집을 방문하시는 친정아버지처럼 너무나 좋아하셨습니다.
은퇴 후, 다시 설교를 하시니 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으셨던지, 설교시간이 한시간이 넘어가자 뒤에 계신 사모님이 그만하시라고 손사래를 치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언제든 이곳에 다시 오시라고 했지만, 이제 다시는 뵐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 정 목사님, 오늘 새벽 기도를 하며 천국에서 환히 웃으시며 주님 품에 안기신 정 목사님을 그려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하시며, 목사님의 고단하셨던 등을 도닥여 주셨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셨던 목사님, 아주 자상하셨지만, 불의 앞에서는 불호령도 서슴치 않았던 정 목사님, 당신께서 기도와 눈물로, 몸으로 평생 세우신 교회와 성도들은 정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을 늘 그리워하며 기억할 것입니다.
목사님이 평생 뿌리신 복음의 씨앗은 민들레 홀씨처럼 곳곳에 흩어져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또 맺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감리교신학대학 대 선배 정 목사님, 저를 딸처럼 사랑해 주셨던 정지한 목사님, 많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