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렬(감리교 원로목사)
형님, 어찌 이리도 서둘러 가시다니요? 제가 전화 드릴 때마다 “형님!” 하고 부르면 “형이라고 부르지 말어요. 형 노릇도 못하는데” “그래도 저에겐 형님이세요”라곤 했지요.
지난 3월 중순 전화 하셔서 2월 원로목사회 월례회에서 못봤다고 하시면서 금년 6~7월에는 내가 살고 있는 필란으로 살구, 복숭아 따러 가야할 텐데 하셨지요? 지금 복숭아꽃, 살구꽃, 천도복숭아 꽃들이 허드러지게 피어 열매를 기다리는데 그냥 가시다니요….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감리교신학교는 4년 선배시지만 그 당시 학군제로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시어 감신대 학생회장으로 수고하시다가 6·3 항쟁(六三抗爭) 한일 비준 반대운동 으로 인해서 6개월 간 옥고를 치르신 후 그 후유증 때문에 미국에 먼저 가 계신 사모님에게 가셔야할 미국행도 늦어지신 적이 있고, 최근에는 걸음걸이가 불편하셨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가 감신대의 전도대를 3학년까지 하고 정 목사님 팀에게 물려 줬는데, 그 팀과 함께 원주의 저희 집을 방문하시어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밤늦도록 깊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시카고제일연합감리교회 부목사로 청빙을 받아 미국으로 오게 됐을 때 제게 연락하시어 비행기 표를 시카고로 끊지 말고 LA를 잠시 들려가라고 해서 무슨 일이냐고 여쭸더니, 부목사로 들어가면 그날부터 쉬지도 못하고 여행도 못하니 우선 와서 쉬었다가 가는 게 좋다고 해서 LA로 와서 2~3일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시카고 차현회 목사님이 “왜 민 목사를 잡고 있어? 빨리 보내라”고 하셨는데도 “3일후에나 보내겠다”며 아낌없이 애정을 쏟아주신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차 목사님도 세상을 떠나셨고 이제 정 목사님도 우리 곁은 떠나셨습니다.
1971년경 철원군 갈말면에 있는 대한수도원(원장 전진 선생)에 금식기도를 갔다가 그곳에서
정지한 목사님(오른쪽)을 만나 근처에 있는 승일교(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을 따서 만든 다리)에서
찍은 기념사진. 53년 전의 사진이다.
주변에 이런 얘기를 했더니 친구, 후배들이 한결같이 형님의 배려와 사랑을 안 받은 사람이 없더라고요. 저 뿐 아니라 많은 후배들에게 ‘사랑의 빚’만 지워 놓으시고 그렇게 홀연히 가시다니요?
저희 내외가 필란지역 산골짜기에 어렵사리 집을 마련하고 친분있는 몇 분들을 초청했을 때 함께 오셔서 하룻밤을 쉬어가고 싶다고 하시어 첫 게스트로 모시게 되었음은 우리 내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었죠.
다음날 아침에 밖에 나가셔서 “아! 공기가 맛있다는 게 바로 이 맛이구나! 내가 자주 와서 이 공기를 맛보고 싶네”라고 하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었다니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나님은 3년 전 저의 아내를 천국입성 시켜 주셨는데 이제 목사님도 빛과 사랑이 넘치는 그 영원한 안식처, 하늘 아버지의 품에 안기시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大光(큰 빛)으로 사셨던 정지한 목사님! 이제 하늘의 별이 되시어 뒤를 따를 우리를 비춰 주소서.
홀로 되신 정충자 사모님과 두 아들 모세 가족, 죠셉 가족, 우리 모두 사랑의 빚진 자들이 기도와 정성으로 돌봐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62년 동안 형님의 동생으로의 삶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우리 형님,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정지한 목사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Requiem aeteriunam dona eis, Domine”.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