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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7/03/24
나는 매일 국회의원이 된다

 

우리 집엔 베일리(Bailey)란 이름을 가진 강아지가 있다. 아들 집에서 유기견을 입양하여 키우다가 두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들 때문에 바빠서 우리 집에 위탁 양육된 강아지다. 종류는 토이 푸들이다.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나이는 금년 15세, 사람으로 치면 90세가 넘었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우리 집안에선 ‘보물’처럼 떠받들고 있다.


베일리는 나의 건강 트레이너다. 아침이면 현관 문 앞에서 문을 열고 나가자는 시늉 때문에 어쩔수 없이 앞세워 나간다. 그러기를 벌써 2년째다. 나의 유산소 운동은 이 놈이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어느 날 이 베일리를 앞세워(리시를 하지 않아도 말을 잘 알아들어서 그냥 데리고 다님) 동네 정해진 산책길에 나섰다. 아침이면 개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로 우리 동네 산책길은 삽시간에 개판이 되곤 한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나는 손을 흔든다. 어떤 사람은 옆집 아는 사람이고 어느 때는 그냥 모르는 사람에게도 손을 흔들어 아침인사를 한다.



옆에 있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무슨 국회의원이요? 지나가는 사람마다 모두 손을 흔들게?” 아마 한국의 지난 총선 때 국회의원 하겠다는 사람마다 동네를 누비며 손을 흔들고 한표 찍어 달라고 구걸 하던 선거유세를 TV에서 본 모양이다.


손을 흔들며 “굿모닝”, 혹은 “하이”하고 인사하는데 돈 드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공짜 선심이 주변사람들에게 명랑한 하루를 선물하는 거라고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인색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일부러 “치즈” 혹은 “김치”하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지 않으면 꼭 싸움하러 덤비는 사람들처럼 무뚝뚝하고 심지어 험상궂은 범죄자처럼 보일 경우도 있다.


사람은 인사성이 밝아야 한다. 옛날 어른들이 하던 말이다. 인사성이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차리는 성질이나 품성을 말한다. ‘인사만 잘해도 먹고는 산다’란 어느 교회 표어를 보고 맞는 말이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개가 사람처럼 대우받는 세상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사성 때문이다. 주인이 기분 나쁜 일로 얼굴을 찡그리고 들어와도 살살 꼬리를 치며 반가워 죽겠다고 한다. 슬픈 일을 만나 풀이 죽어 집에 왔는데도 그런 분위기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즐겁고 기쁘게 맞아준다. 그게 개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개를 키운다.


LA 한인타운에도 식당은 널려있다. 어느 식당에 가면 물 좀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쳐도 들은 척도 안하는 불친절한 식당이 있는가 하면 요즘 같은 땡볕에도 손님들이 파킹하는 곳까지 나와서 주차 때문에 고생하지 않나 보살피며 안내해 주는 인사성 만점 식당도 있다. 고객이라면 어느 식당엘 가겠는가?


교회도 널려 있다. 처음 교회당에 들어섰는데 교회주보만 덜렁 테이블에 올려놓고 알아서 한 장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배짱 좋은 교회가 있는가하면 교회당 입구에서 줄을 서서 안내해 주는 분들 때문에 들어갈 때부터 기분 좋은 교회도 있다. 교회는 크게 인사성이 좋은 교회와 인사성이 형편없는 교회로 나뉜다. 인사성이 좋은 교회는 작은 교회라도 천국처럼 느껴진다. 인사성이 제로인 교회는 DMV나 우체국에 들어선 것 느껴진다. 그런 교회 가고 싶어지겠는가?



내가 목회할 때 아내와 다짐한 게 있다. 다른 건 못해도 교인들 만나면 90도 폴더인사로 깍듯하게 인사부터 하자는 것이었다. 아내는 평소 인사를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더 잘해서 다른데서 드러나는 단점을 방까이(만회) 해보자는 것이었다. 미주 한인교회서 목사 사모는 툭하면 동네북이다. 그나마 인사성이라도 밝아야 덜 두들겨 맞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인사성이 아무리 밝은 사모라 할지라도 닥치는 대로 씹는 게 습관화된 사람들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도바울은 인사성의 대가였다. 신약성경 후반부에 나오는 바울서신의 수신처 이름들은 대개 그분이 개척한 교회들이다. 신약성서 27권중 서신(Epistle) 혹은 편지(Letter)의 형태로 된 글이 21개나 있는데 그 중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 13개에 달한다.



예를 들면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로마 등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에 보낸 서신들을 우리는 ‘바울서신’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서신들의 첫 부분이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구구절절 겸손한 인사말이다. 고린도 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도 역시 “성도로 부름 받은 모든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 . . 인사성의 모범을 보여준 위대한 바울 선생님. 그런 바울의 겸손한 인사성 때문에 결국 복음의 ‘복’자도 모르던 복음 불모지 소아시아 지역,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교회개척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내가 뭐래도 난 매일아침 국회의원이 될 참이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빈 손이라도 흔들어서 이 세상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일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명을 살리는 진리라 할지라도 인사성이 없는 거만한 포장지에 싸여 있다면 어디 한치 앞에라도 전파될 리가 있겠는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인사성마저 품절되었는가? 제발 겸손하게 인사부터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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