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철(목사, Ph.D)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덕담 속의 세 가지 말을 음미하는 것으로 신년 인사를 드립니다. 우선 ‘새 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제까지 뜨고 지던 태양이 갑자기 달라져 새로운 해(태양)로 변했기에 ‘새 해’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또 을사년 새 달력을 벽에 걸어 놓아서 ‘새 해’가 되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어째서 그 수많은 나날들 가운데 한 날을 구분해 ‘새 해’라 이름 짓고 의미를 더합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 현재 우리가 쓰는 태양력의 새 해 기준은 기원전 46년 율리우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율리우스 이전 사람들은 한 해의 시작 달이 3월이고 마지막 달이 2월이었습니다.
이런 태양럭기준을 오늘의 1월을 한 해의 시작 달로, 마지막 달을 12월로 고친 사람이 율리우스입니다. 또한 ‘율리우스력’ 이전에는 1년이 355일이었기 때문에 365일로 늘어난 10일을 열두 달 안에 배치해야 하는데, 어떤 일이 벌어 졌는지 아십니까? 이 때 한 달을 30일 또는 31일로 재구성하였고 그 기준으로 주먹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주먹을 쥐었을 때 검지 손가락뼈를 1월로 기준 잡고, 이를 시작으로 뼈가 튀어나온 달을 31일, 안으로 들어간 달을 30일로 오늘날처럼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율리우스력’이 완벽한 달력이 아닙니다. 1582년 그레고리 13세는 부활절의 날짜를 맞추기 위해 1582년 10월 4일 다음날을 10월 15일로 정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달력을 ‘그레고리력’이라고 합니다.
이런 장황한 달력 이야기를 읊조리는 이유는, ‘새 해’란 태양력에 따른 달력을 벽에 걸었기에 발현되는 것이 아니고, 또 ‘새 해’란 하늘 위 태양의 화학적/물리적 실체의 변화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새 해’가 가능할까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경귀가 있습니다. 옛날 은나라 시조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겨놓고 자신의 성찰을 위한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 즉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새로움(Newness)’은 ‘보다 나아짐’(Betterness)‘을 지향합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현재의 처지(Status Quo/Existing state)에 머물지 않고 나아짐의 세계를 향해 질주하겠다는 다짐이 있을 때 비로서 ‘새 해’는 출현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안락한 상태를 뒤로하고, 비록 불확실하지만 내일의 이상을 실현키 위해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돌진하는 마음/각오에서 ‘새 해’는 떠오릅니다.
둘째로 ‘복’에 대한 생각입니다. 사람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온 피조물이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의 답이 있다면 ‘복’입니다. 서경은 누구나 바라는 ‘복’을 다섯 가지로 말합니다. ‘수’(장수하는 것), ‘부’(부유한 삶을 영위 하는 것), ‘강녕’(건강히 사는 것), ‘유호덕’(좋은 덕을 지닌 삶), 그리고 ‘고종명’(원망과 한을 남기지 않고 천수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구구팔팔이삼사’(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아프다 죽는다)의 삶을 어느 누구가 마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삶의 내용 전체가 이럴 수는 없지요. 전도서 3장 말씀처럼 인생살이는 계절이 있어, 해가 뜨는 때가 있으면 지는 때가 있고,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어야할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으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해가 질 때, 내리 막 길에 섰을 때, 울어야할 때, 아플 때입니다. 즉 인생의 화/고통/고난이 닥칠 때 어떻게 슬며시 그 언덕을 오르고 파도를 타느냐에 따라 인생의 맛과 멋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나는 믿습니다. 인생의 최고/웃질의 ‘복’은 ‘전화위복’이라고.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으니 인생의 파도를 잘 타는 새 해가 됐으면 합니다.
끝으로 ‘받으세요’란 수동적 인간 존재방식입니다. 인생은 복을 스스로 만드는 자(Maker of blessing)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복의 근원은 하늘(하느님)에 있고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복을 받는 자(Receiver of blessing)가 되기도 합니다. 하여 우리의 존재양식을 능동적 위치에서 수동적으로 바꿀 수도 있어야합니다. ‘복을 받는 자’가 되려면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신비적 신인합일의 영적 씨름이 있을 뿐입니다. 가장 수동적 인간존재 양식을 모범으로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 나 아닌 타인의 뜻에 자신을 양보하는 것, 이것이 가장 고귀한 인생의 존재양식이라 나는 믿습니다. 이러면 을사년은 멋지고 맛나는 새 해가 될 것입니다.
밝은 새 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