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명(박사,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밸러스트(ballast)는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 내부에 저장하는 바닷물(평형수)이다. 고대 선박의 경우, 바닷물 대신 돌이나 모래를 바닥에 실어 무게중심을 잡아 주었다. 2014년 침몰한 세월호의 사고 원인이 배 아랫부분의 밸러스트 탱크에서 물을 빼 무게 중심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은 영적 파산에 이르는 첩경이다. 회개는 그러한 파산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 신앙의 중심을 잡아 주어 영적 항해를 지속하게 하는 복원력이다.
회개는 카타르시스, 즉 자기 감정의 배설이 아니다. 눈물 뿌리는 회한을 넘어 일상의 초점을 바로잡는 일이다.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같은 사고의 바탕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의식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환골탈태의 경험이다. 이런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넘어 사회에도 뿌리내릴 수 있도록 책임과 헌신을 다하는 데까지 확장한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인데, 신약성서에서는 이 단어의 명사형과 동사형을 다 합쳐서 56회 나타난다. ‘메타노이아’는 ‘뒤에’를 뜻하는 ‘메타’와 ‘안다’ 혹은 ‘깨닫는다’를 의미하는 ‘노에오’의 변형인 ‘노이아’의 합성어이다.
즉 문자적으로는 ‘뒤에(라도) 깨닫는다’는 의미이고 좀 더 종교적인 뜻풀이를 하자면 회개 혹은 회심으로 이끄는 마음의 변화다. 이 단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슈브’인데, 그 뜻은 ‘돌아오다’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 31:6). “야훼께 돌아오라”는 야훼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파기하고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구호였다.
따라서 ‘슈브’는 단순한 마음의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회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슥 1:3).
일반적으로 ‘회개’의 한자어 표기는 ‘뉘우칠 회(悔)’가 들어간 ‘悔改’이다. 그러다 보니 성서가 가르치는 회개의 의미가 축소내지 변질되고 말았다. 성서적인 회개의 의미를 담으려면 ‘돌아올 회(回)’로 표기된 ‘回改’가 되어야 할 것이다. 회개는 뉘우침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멈추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허물이 잘못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없는 것이 잘못이다. 사람은 회개를 통해서 향상하고 성숙하는 존재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리에 서서 깊이 뉘우치고 그 끊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 돌아가는 것이 회개다. 관계 회복으로 주어지는 희열과 희망이 배제된 회개는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다. 참회를 과정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돌아감이 있어야지 진정한 회개에 이른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불순종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 즉 부자(父子) 관계의 회복이 ‘슈브’의 뜻에 해당된다.
‘돌아온 탕자’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남긴 불후의 명작이다. 그는 강력한 명암 대비와 정교한 구도로 인간의 내면세계 드러내는 데 천재적 재능을 보인다. 이 그림에서 돌아온 탕자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닳아진 신발 뒤축으로 물집 잡힌 시커먼 발바닥을 드러낸 아들의 모습은 오갈 데 없는 처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붉은 망토를 두른 늙은 눈 먼 아버지는 아들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앞으로 몸을 굽히고 아들의 등과 어깨에 두 손을 대고 있다. 아버지 모습에는 부정(父情)과 관용이 느껴진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옷의 색상은 비슷하여 화합과 일치의 순간을 보여준다.
회개의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4:17). 예수께서 선포하신 ‘회개’는 ‘메타노이아’보다는 ‘슈브’에 가깝다. 마음 상태의 변화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란 모든 종교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 각성이나 도덕적 회심이나 성례전적 고해(告解)보다 더 근원적인 변화와 전향(轉向)이다.
따라서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전인적 결단이고 실천이다. 중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갈라놓아 언저리로 밀어내는 원심력을 ‘죄’라고 한다면, ‘회개’는 그 죄로 인해 벌어진 관계를 다시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인 셈이다.
물론 그러한 구심력을 추동하는 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옛 자아의 청산과 그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즉 하나님 형상의 회복까지 포함한다. 회개는 속죄를 이루는 은총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깨달음이고 거듭남이고 도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