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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4/01/25
고난주간 묵상 . . . “삼세번”

 

충청도의 한 교회 전도사님이 한 학생에게 질문했다. “학생,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까요?” 학생이 대답했다. “의사표현 확실히 할라구 한 거 아녀유?, 세 번은 말혀야지. 세 번은 물어 줘여 되는 것이고. . .” 청주출신 소설가 나연만의 ‘충청의 말들’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곧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다. 고난주간을 성극 드라마로 따지면 감람산과 예루살렘은 드라마의 무대이고 주연은 예수님, 조연은 베드로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수석제자이기도 했지만 그가 약속을 어기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12제자 가운데 단연 그가 조연급이다. 그래서 성지 순례자들은 시온산 기슭에 있는 ‘베드로 통곡교회’를 빼놓지 않고 순례코스에 집어넣는다. 어쩌면 예수님을 모른척했던 베드로의 모습이 그동안 여러모양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왔던 내 모양새와 아주 비스무리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가슴이 찔려서 그럴 것이다.


통곡교회 밖에는 예수님을 아주 능청스럽게 부인하고 있는 베드로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 꼭대기에는 울고 있는 닭의 모습도 있다. 동상 밑에는 “Non novi illum”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눅 22:57)”란 뜻이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만났을 때 세 번으로 응수하셨다. “네가 어따대고 그럴 수 있어? 세 번이나 날 부인해?” 그런 책망이 아니었다. 예상을 깨는 대 반전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번도 아니고 예수님의 질문도 삼세번이었다.


성경에서 세 번은 종종 강조의 의미, 완전의 의미로 사용된다. 세계역사를 바꾼 예수님의 부활도 3일 만에 이루어졌고 이사야 6:3에서는 “거룩하다”란 말이 세 번 반복된다. 기독교의 핵심인 3위일체 교리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3위 하나님이 한분으로 존재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3이란 숫자는 이래저래 확실한 숫자로 자리 잡았다. 만세를 부를 때도 언제나 만세삼창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그냥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삼세번은 해야 한다. 서당개가 풍월을 읊는 수습기간도 3년이다. 구슬을 얼마나 꿰어야 보배가 되는가? 그것도 세말은 되어야 한다. 시집살이 하려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은 해야 시집살이 합격증을 받는다고 했다. 작심 3일이란 말도 있다. 3일을 넘겨야 굳은 결심으로 간주되었다.


더 있다. 사진 찍을 때도 요즘엔 “치이~즈”란 말로 대체되어 기름기가 흐르는 것 같아 메스껍지만 전통적으로는 역시 “하나둘셋”이었다. 법정에서 판사님(요즘엔 판사님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판사들이 존경받는 세상인가?)이 방망이를 두들길 때도 삼세번이다.


서양에서 행운의 숫자는 ‘럭키 세븐(7)’이지만 3이란 숫자는 보통 완성, 종결, 행운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한다. 이게 베드로의 가야바 법정에서의 삼세번 부인, 예수님의 갈릴리 호수에서의 삼세번 질문에서 유래된 것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삼세번이란 단칼에 뭐가 되는 게 없고 모든 일에는 정제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숫자가 아닐까?


금을 정제하는데도 세 번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첫 번째 불에서는 찌꺼기가 제거되지만 여전히 불순물이 남아 있는 단계이고 두 번째 불을 지나야 순결한 금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단계, 그래서 세 번째 불을 지나야 비로소 순금이 완성된다고 한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앙고백으로 복음의 핵심을 꿰뚫은 대단한 제자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기록부에 A+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란 칭찬을 들은 베드로가 아닌가?


그랬던 우등생 베드로가 갈릴리의 목가적인 삶의 터전을 벗어나 고관대작들과 고위직 성직자들이 우글대는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뒤따라 입성한 후에는 그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어쩌면 환경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은 도마보다는 약간 죄질이 약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른다고 고개를 내저은 오리발 위증죄를 범하고 말았던 베드로.


우리는 어떤가? 예배당에서는 삼세번 “주여, 주여, 주여”를 외치며 통성기도를 끝내고 세상에 나와서는 베드로처럼 오리발 위증죄를 범하고 사는 경우가 다반사가 아닌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언제나 선택은 세상적. . . 그게 고개저어 주님을 배반했던 배드로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베드로에겐 싸늘한 이른 새벽 갈릴리 호수가에서 떡과 생선을 준비하고 계셨던 예수님의 기다림이 있었다. 베드로의 회복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이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은 실패가 아니라 어쩌면 연단의 과정일수도 있다. 삼세번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회복과 사명에 대한 확증이었을 것이다.


삼세번! 그것은 연약함-기다림-회복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삼세번 부인하며 살아왔어도 삼세번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분이 내 죄를 대신하여 골고다 언덕에 올라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능욕을 받으며 죽임을 당한 때가 바로 고난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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