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렬(감리교 원로목사)
홀로 누워 괴로울 때 헤매다가 지칠 때
부르시던 찬송 소리 귀에 살아옵니다.
반석에서 샘물 나고 황무지에 꽃피니
예수님과 동행하면 두려울 것 없어라
이 찬송은 새 찬송가 579장, 주요한 작사, 구두회 작곡으로 ‘어머니의 넓은 사랑‘의 3절입니다. 이민생활 50여년이 되고 이민목회 36년간 어머니 주일마다 위의 찬송을 택하지만 끝까지 부르지 못한 찬송입니다. 매년 맞이할 때마다 다짐하지만 꼭 이 3절에 가서는 예외 없이 목이 메이고 손수건을 적시곤 했습니다. 이민생활, 그리고 녹록치 않은 이민목회의 어려움이 떠오르며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 80이 넘었음에도, 어머니를 떠올리든지 혹은 ‘어머니’란 단어, 어머니에 관한 노래가 들리면 가슴이 뭉클해 지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으며 깊은 그리움이 밀려오곤 합니다. 따뜻한 손길, 부드러운 목소리, 언제나 감싸주던 그 사랑이 떠오르면서 마음 한구석이 저려오기도 합니다.
‘어머니’ 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 같다가도, 문득 사무치게 그리운 존재입니다. 6.25 동란이 끝나고 가난으로 모두 힘들 때,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좁쌀을 사가지고 집에 오다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바가지가 깨지면서 좁쌀이 흙바닥에 흩어져 깨진 바가지 조각에 주섬주섬 긁어모아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내밀며 말을 못하고 훌쩍였더니, 야단 대신에 ”그래도 모래보다 좁쌀이 더 많네” 하시며 등을 토닥여 주시던 어머니, 그 품성의 일부가 나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된 듯 합니다. 지금도 문득 문득 혹은 힘들 때 말없이 내 편이 되어 주시던 모습이 떠오르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합니다.
몇 년 전에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에 들렸을 때에, 사임당(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머무를 즈음에 고향에 홀로 계시는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애틋한 마음으로 지은 시가 오랜 동안 마음에 남았기에 옮겨봅니다.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리
꿈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 뿐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동서고금, 남녀노소 그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필자는 어머니를 미국에 초청하여 목회한다는 핑계로 구경도 못시켜 드려 죄송한 마음이면서 계속 곁에 머물러 계시길 바랬는데 몇 개월 만에 귀국하시면서 ‘내가 머물던 곳이 더 편해’ 하시면서 막내 아우 댁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아우 내외가 지극정성으로 모셨음에 감사의 마음과 빚진 마음을 잠시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주변에 연로하신 분들을 섬기는 일이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의 은혜와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접한 노래 ‘어머니의 계절’ 이라는 노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알려진 ‘알고보니 혼수상태’의 김지한, 김경범의 작사, 작곡인데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를 더욱 그리워하게 하는 노래 같습니다.
내 맘이 지치고 힘이 든 날에
첫 번째로 찾는 그 이름
마치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잊고 사는 이
서러울 때만 그대를 찾는
난 꽃이 아닌 못난 짐이요
그래도 나를 감싸주며 품어주는 계절이여
어머니 당신의 계절은 오늘도 흘러 갑니다
미안해서 미안해서 눈물이 납니다.
언제나 부르고 싶은 그 이름, ‘엄마’ ‘어머니’ . . .어느 글에, ‘엄마는 내가 엄마보다 작았을 때 부르고,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보다 컸을 때 부른다고 하더군요.
즉, 엄마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철이 덜 들었을 때였고, 철이 들어서는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철이 덜 들어도 ‘엄마’하고 불러보고 싶고, ‘어머니’ 하고 외쳐 불러보고 싶지만 대답은 없어도 이미 천국 백성되시어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심을 상상하며 감사와 그리고 언젠가는 해후의 날을 기다리며 믿음의 길을 달려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어머니’ 그리고 주변에 계신 어머니들, 또 어머니가 되실 분들 사랑합니다.
“Happy Mother’s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