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혁인(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 목사)
하루를 여는 아침,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새소리와 햇살의 부드러운 손길에 잠시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중동의 전쟁 소식 앞에 다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되풀이되는 교전과 폭격, 잿더미가 된 도시, 울부짖는 아이들의 얼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뼈아픈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기심이 인간의 본성이라 말하는 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미보다 이익을 좇고, 이해타산에 맞지 않으면 너무 쉽게 등을 돌립니다. 타인의 고통에는 눈 감으면서도, 자기 상처에는 정의라는 이름을 붙여 복수를 정당화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의 방식은 결국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얹을 뿐입니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고, 배제는 폭력으로, 증오는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유산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 5:9).
이 말씀은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갈등이나 종교적 적대, 민족적 자부심보다 훨씬 깊고도 넓은 길을 가리킵니다. 그 길은 지배하거나 굴복시키는 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길, 곧 상생과 공존의 길입니다.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를 제거해야만 내가 안전하다는 세계관은 결국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의 고귀함입니다. 삶은 결코 계산이나 효율로만 환산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 앞에 설 때, 경건한 두려움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은 힘과 힘이 맞붙는 대결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눈물짓는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칼을 든 자가 아니라, 떡을 떼어 나누는 자로 기억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폭력의 논리 대신 평화의 상상력을 품어야 합니다. 그 상상력은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고 연약한 선택들 속에서 움트기 시작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상처를 보듬고,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에서 말이지요.
전쟁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쩌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길만이 결국 이 땅을 다시 생명의 땅으로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불타는 도시 한가운데서도, 그분의 말씀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작은 불씨처럼 살아 숨 쉬기를 소망하는 까닭입니다.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제 자리를 찾고, 서로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질서, 그것이야말로 참된 평화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그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그렇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 길로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몫이요, 우리가 짊어진 소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