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혁인(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 목사)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다가 우연히 ‘외동(once-born)형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주목을 끌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외동의 특성이 형제들과의 경쟁이나 협력 없이 부모의 관심과 자원을 독점하며 성장하기에, 사회성이 부족하고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심령이 늘 하늘빛인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어두운 면보다는 꽃과 별과 바다의 황홀한 순수에 더 공감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서든 하나님에 대해서든 나쁜 것을 전혀 떠올리지 못합니다. 애초부터 때묻지 않아, 회심의 필요성이 없어 보이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고 해서 특별히 동화처럼 천진난만한 곳일 수는 없습니다. 그 곳에도 여전히 고통의 울음과 억눌린 신음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외동형 신앙을 가진 이들의 순수함이, 때묻은 현실을 ‘나의 세상’이 아니라고 외면하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할 때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들”의 변화를 위한 것처럼 비뚤어지게 됩니다. 신앙이 타인을 향한 훈계의 도구로 변질되는 것이지요.
비유하자면, 외동형 신앙은 마치 온실 속에서만 자라는 꽃과 같습니다. 유리 벽 안에서는 햇살도 비도 적당히 차단되어 언제나 고요하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리고 장맛비에 시달리며 자라난 들꽃과는 달리, 온실의 꽃은 세상의 거친 바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 빛나는 색채가 눈부시기는 하나, 향기는 바깥세상의 흙내와 섞이지 못한 채 외로이 머물 뿐입니다. 신앙 역시 온실 속에만 가둘 수 없습니다. 흙먼지 이는 길 위에서, 땀과 눈물의 냄새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외동형’ 인간이 늘어나는 시대에 우리의 신앙 또한 피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무르거나, 나와 상관없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 스럽습니다.
삶의 불편한 진실은 늘 우리 곁에 있는데, 신앙을 빙자해 그 불편함을 피해가는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신앙의 공동체로 부르신 것은, 어쩌면 외동으로만 살려는 우리에게 진정한 형제자매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깨닫게 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형제자매는 나를 불편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 아닌 이의 눈물과 아픔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만 우리의 신앙은 외동의 빛바랜 순수함을 넘어, 진정한 사랑의 빛깔을 띠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