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부(로스펠리즈연합감리교회 목사)
지난 8월 10일 저녁, 로스펠리즈 연합감리교회에서 특별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연합감리교회(UMC) 칼팩연회 한인 코커스가 주관하고, 목회 코칭과 신앙 코칭을 하는 엠마오코칭센터(www.emmauscoachingcenter.org)가 후원하여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연세대학교 권수영 교수님을 모시고 “성장을 위한 새로운 목회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권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에포케(Epoche)’였습니다. 에포케란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단순히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굳어져 있는 해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선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거나, 상대방을 단정 짓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선은 종종 멈추고 기다릴 때 열립니다. 에포케는 그 기다림의 틈을 만들어, 성령의 음성이 우리 생각 속에 스며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무리 앞에서 곧바로 판결하지 않으시고, 땅에 쓰시며 침묵하신 장면(요 8:6-7)은 그 좋은 예입니다. 그 ‘잠시의 멈춤’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아보게 했고, 정죄의 돌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직장에서도 ‘에포케, 잠시 멈춤’이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보고 즉시 마음속에 ‘판결’을 내리고 싶은 순간, 잠시 멈추어 보십시다. 그 멈춤 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시선과 해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가 제 마음에 크게 울렸습니다. 판단을 멈춘다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영적인 용기입니다. 또한 에포케는 내 마음을 방어하는 시간이며, 감정이 아닌 진리로 반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훈련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은 이 에포케를 ‘괄호 치기’라고 해석했습니다. 판단을 완전히 배제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판단과 지식에 일단 괄호를 치고 지켜보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에포케는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모든 상황을 내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게 만듭니다. 또한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게 하며, 관계의 갈등 속에서도 화해의 길을 찾게 합니다. 무엇보다, 에포케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멈추지만,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손길은 항상 우리 안에서, 우리 주변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서두르지 말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잠시 멈추는 ‘에포케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평강이 우리 삶에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