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순(윌셔연합감리교회 원로목사)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1. 요즘 정치계나 종교계에서 또는 일반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당신은 보수입니까? 진보입니까? 이런 질문을 즉흥적으로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보수나 진보는 어떤 고정된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또는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보수 경향이 많다, 또는 진보 경향이 많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고정될 수 없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비교적 진보적일 수 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대체적으로 보수 경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구태여 구분해 보자면, 보수는 기본 가치관을 중요시하고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고, 진보는 기본 가치관을 중요시하면서도 새로운 미래를 향해 새로운 것을 창조 내지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그것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개인도 이 보수와 진보의 경향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보수가 오늘에는 진보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보수가 내일에는 진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연성은 생동하는 생명체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어느 시점에서 고정되어 있으면 그 생명체는 죽음으로 막을 내릴 것입니다. 새 생명체는 고정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것으로 진보해야 합니다. 그런 변화의 과정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데, 그런 유연성이 건전한 생명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의 인물들 중에도 보수와 진보의 뚜렷한 차이를 보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보수였을까? 진보였을까?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질문해 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당대에는 진보 이상, 급격한 진보, Radical 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시각에서 보는 예수님은 유대 율법이나 전통 또는 가치관을 파괴하는 이단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고(보수),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Update 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로, 유대인의 가르침에 의하면, 형제끼리는 서로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파격적이고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노골적으로, “너희는 그렇게 배웠으나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심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이런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났고,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우리들이 잘 아는 대로 초대교회의 큰 두 개의 기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고백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반석위에 교회를 건설했고, 바울은 초대교회의 부흥을 일으킨 선교사였습니다. 두 사람의 배경을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가 납니다. 베드로는 어부 출신으로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관심을 가졌고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 헌신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보자면 베드로는 보수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바울은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고학력 엘리트였습니다.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희랍의 문화를 터득한 학자이며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폭 넓은 교육은 유대인들에게 한정된 시야에 매이지 않고 적어도 세계를 바라보는 눈으로 비유대인 즉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면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고,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세계 선교에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도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교회 간에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성서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베드로를 호출하여, 이방인 점령군이며 로마의 고급 장교인 고넬료 집에 가서 먹고 전도한 사실을 들어 질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어찌해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 환상 사건을 설명하며,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받은 그 성령의 선물을 그들도 받는 것을 보았는데 이 놀라운 역사를 내가 어떻게 막겠느냐고 항변합니다. 다행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화해로 결말을 짓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교인들과 이방인 교인들과의 갈등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할례문제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의 정체성에는 할례가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유대인은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된 것을 보고, 그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너무나 생소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중재인의 위치에서 이방인에게는 율법 준수 즉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할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한편 이방인인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이미 구원받은 신자이며, 복음 사역의 원활한 진행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현지 유대인들의 반발을 줄이고 공동체 통합을 꾀하려는 전략적 목적으로 할례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는 유대인 교인과 이방인 교인 간에 더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은 제사에서 우상에게 받쳤던 고기는 절대 먹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는 그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교인이 된 이방인들은 전과 같이 아무 거리낌 없이 시장에서 그런 고기를 사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 교인들이 문제를 삼았고, 이 문제는 사도 바울에게까지 올라왔습니다.
고린도 전서 8장에서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이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요약해서 설명하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어도 된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자신은 고기를 절대 먹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상에게 받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 교인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방인 교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먹던 음식인데 그것이 구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상처를 줄 뿐 아니라, 불공평한 처사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결론적으로 하나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우상에게 받친 고기를 먹느냐 또는 먹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각자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다 양심에 따라서 할 것이지만, 다만 이런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배려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배려는 믿는 교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의 성자라고 칭송을 받는 성 어거스틴이 했다는 말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 맘대로 하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자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절대 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기를 먹는 문제도 거기서 해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교인들이 이방인들의 관습과 전통을 이해한다면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5. 이런 갈등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위의 문제들도 유대인의 문화와 이방인의 문화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문화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문화를 기준으로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한인은 한국인의 문화가 있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종교에도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문화도 다르다는 뜻입니다. 종교마다 다 고유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사의 거의 모든 문제는 문화 갈등에서 오고, 그 갈등이 심지어는 문화 전쟁에까지 확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의 차이를 서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화에는 우열이 없고 다만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정의는 서양문화의 종말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문화에는 가치관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문화의 가치에 대해서도 서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화가 다 다르고 차이가 있어도 모든 문화의 공통되는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최고의 가치에서 모든 문화는 서로 만날 수 있고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불교는 자비, 유교는 인(仁)이라고 부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정신은 다 사랑입니다. 생명 존중, 생명 살리는 일이 종교의 최고 가치입니다. 그렇지 않은 종교는 종교라고 하지 않고 사교 또는 미신이라고 정의합니다.
보수, 진보도 결국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보수나 진보에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악의 가치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 나의 관점의 차이일 뿐이고 그것은 나의 문화 정체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가 대결 구도로 가서는 안 되고 서로 보완 구도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보수의 가치가 있고 진보의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은 보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렇다고 진보를 무시하지는 마세요.
당신은 진보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렇다고 보수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보수나 진보는 당신의 문화의 한 부분이고 삶의 방향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수나 진보는 가치 기준이 아니고 세상을 보는 눈의 차이일 뿐입니다. 보수와 진보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고 차이가 되는 개념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싫은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나의 생각,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삶을 사는 것이 건전한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문화적으로 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최고 가치인 사랑에서는 다 함께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고의 가치, 사랑 아래서 나의 가치관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 범위를 벗어난 나의 가치관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사회 모든 분야가 다 그래서 화합을 못하고, 분열될 때는 서로 비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6. 결론은 갈라디아서 3장 26-28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옷은 문화를 상징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인종), 종이나 주인이나(신분), 남자나 여자 없이(성별)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보수도 진보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 (Great Commitment)만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