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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3/30/26
[부활절 지상설교]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부활 예수
(요한복음 20장 19-23절)
전재홍(나성 금란교회 목사)

 

흥미로운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에 생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약 38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 거의 30억 년 동안, 지구의 생명체들은 별다른 변화 없이 바닷속에서 단순한 생명활동만 반복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약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짧은 시간 안에 수십 종류의 새로운 생물군이 폭발적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그 원인을 두고 여러 가설을 내놓는데, 그 중 하나가 흥미롭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동물들에게 처음으로 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눈이 생기자 목적이 생겼습니다. 먹이를 쫓아야 하고, 천적을 피해야 하는 목적 말입니다. 그 전까지는 그냥 떠다니던 생명체들이 방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생기는 순간, 삶이 달라진 겁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하는지 보이지 않으면, 우리도 그냥 떠다니게 됩니다. 열심히는 사는데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느낌, 분명히 뭔가를 얻었다고 생각되는데 돌아서면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허무함.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1976년에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을 통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있는데 하나는 소유하려는 성향(더 갖고, 더 쌓고, 더 확보하려는 것), 다른 하나는 존재하려는 성향(나누고, 베풀고, 타인과 연결되려는 것). 그리고 소유 쪽으로만 달려온 사람은 결국 허무함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거의 50년 전 책인데 마치 오늘 우리네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사시는 분들을 참 많이 만납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가족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 열심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 제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열심히 살아온 분들이 더 많이 하시는 말입니다. 소유하는 삶은 살았는데, 존재하는 삶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어디에서 오는 것 일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왜 였을까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3년입니다. 3년 동안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고향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가족도 뒤에 두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단순히 스승을 잃은 슬픔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목표와 소망이, 삶의 방향 전체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들도 잡혀 죽을 수 있다는 공포까지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문을 잠근 것입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그 방 안에 가두어 놓은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저는 제자들을 탓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면 우리도 문을 걸어 잠급니다. 마음의 문, 관계의 문,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했다가 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문을 잠그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 마음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예수님이 오십니다.

 

19절 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잠긴 문이 예수님을 막지 못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 잠근 그 문 너머로도 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신 첫 마디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히브리어로는 샬롬. 평화, 평안, 온전함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문을 잠갔느냐!” “왜 도망쳤느냐!” “내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책망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실망을 표현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마디는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샬롬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함을 보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 평안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너져 있을 때, 실패하고 도망쳐 있을 때, 문을 잠그고 웅크리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시는 말씀이 샬롬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너를 정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너에게 평안을 주러 왔다는 것,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를 찾아오시는 목적입니다.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못 자국이 있는 손,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부활하셨는데 왜 상처를 보여주시는 걸까요? 저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십자가의 그 고통을 통과했다는 증거를,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 살아났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 자리를 통과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 상황을 아시기나 할까?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하실까?’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나도 여기까지 왔다고. 이 자리를 나도 통과했다고. 그러니 너의 아픔과 상처 나도 이해한다’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떻게 됩니까. 20절 후반부입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위험이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문 밖의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 안이 바뀐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안에 있는 나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가득했던 그 방이, 기쁨이 가득한 방으로 바뀐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이 다시 한번 샬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문을 잠그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제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하십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2장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창조의 때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두려움으로 죽어 있던 그들에게, 새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캄브리아기에 눈이 생기자 생명체들이 방향을 갖기 시작했듯이,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삶의 방향이 생겼습니다. 잠긴 문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잠가놓은 방이 있습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한 것들, 포기해버린 꿈들, 누군가에게 상처받아서 닫아버린 마음들. 그 잠긴 방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십니다. 상황을 먼저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을 먼저 바꾸십니다. 두려움이 평안으로, 막혀 있던 마음이 열린 마음으로. 오래 쌓아 두었던 원망이 녹기 시작하고, 오래 외면했던 사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내가 먼저 바뀝니다.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꺼져가던 열정이 다시 살아납니다. 희망 없이 살아가던 삶에 기쁨과 감격이 찾아옵니다. 소유를 향해 달리던 삶에서, 존재를 향한 삶으로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눈이 생기자 생명체들이 달라졌습니다. 방향이 생겼고, 목적이 생겼고, 삶이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에게도 그런 눈이 열립니다. 오늘 먹을 것만 보던 눈이 조금 더 멀리를 봅니다. 내가 왜 이 땅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부활절,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고 계십니다. 잠긴 문 안으로도, 허무한 일상 안으로도, 두려움이 가득한 마음 안으로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샬롬. 너에게 평안이 있으라.” 그 평안이 이 부활절에 여러분 각자의 마음 안에 가득히 임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오래 잠가두었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상황이 아닌 내가 바뀌는, 그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시는 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전재홍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미국 드류신학대학교 졸업

연합감리교 정회원 목사

현재 나성금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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