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혁인(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 목사)
시인 유치환은 그의 시 <행복>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고 노래했습니다. 대개 우리는 사랑받기를 갈구하며 그것을 행복의 척도로 삼곤 하지만, 시인은 그 시선을 뒤집어 놓습니다. 설령 그것이 고독한 그리움일지라도,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여미고 편지를 쓰는 그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라 말합니다.
이 시구를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필연적으로 ''행복을 묻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마치 정형화된 행복의 조건들이 있는 것 마냥 우리 앞에 나열해 보입니다. 안락한 집, 남부럽지 않은 지위, 평탄한 일상. 그러나 그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정원이라 할지라도, 그 정원을 거니는 ''내''가 죽어 있다면 그 풍경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행복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전리품이 아니라, 내면에서 길어 올리는 생수와 같습니다. 내가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내 존재의 빈집을 타인의 시선으로만 채우려 한다면 행복은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을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무엇을 가졌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어떤 이들에게 부활은 비과학적이고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증거를 요구하며 벽 뒤에 숨어 냉소합니다. 그러나 삶의 밑바닥,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절망의 심연에 발을 딛고 선 이들에게 부활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희망의 불씨''입니다. 똑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면서도 누군가는 어둠만을 보고, 누군가는 그 틈새로 비치는 빛을 봅니다. 이는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존재의 태도''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라는 질문을 멈추고,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갈등이 없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슬픔 속에서도 타인의 아픔을 볼 줄 아는 사람, 부족함 속에서도 나눌 것을 찾아내는 사람,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다시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사람. 이런 이들이야말로 행복의 주인입니다. 행복은 ''있고 없고''의 소유론적 차원을 넘어, ''누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잠시 멈추어, 시인이 우체국 창문 앞에서 느꼈던 그 설렘을 한번 같이 느껴보세요.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진정 나를 사랑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 복된 순간을 느끼는 겁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가두고 있던 욕망의 감옥에서 걸어 나와, 누군가를 향해 진심 어린 안부를 전할 수 있는 그 ''마음의 근력''이 바로 행복의 시작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의 뜰에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로 인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경탄이 터져 나오기를 진심으로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