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명(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몇 해 전, 나는 한 달 가까이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쉬고 있었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공황이 찾아올 때마다 폐가 닫히는 것 같았고, 다음 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온몸을 덮쳤다. 수십 년간 설교단에서 생명의 존귀함을 말해온 사람이, 정작 자신의 생명 앞에서 아무 말도 찾지 못했다.
어느 밤, 나는 공원을 미친 듯이 달렸다. 세 바퀴를 돌고 멈춰 서던 그 순간, 문득 알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숨을 스스로 만들어 낸 적이 없다는 것을. 숨은 처음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했다—그저 살려달라고. 손을 놓는 순간, 진창 아래에서 무언가가 발을 받쳐 올렸다. 굴복이 아니었다. 손을 놓는 것이 잡히는 일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말만 나오면 분위기를 바꾼다.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자”며 웃어 넘긴다. 마치 입에 올리면 내일 당장 찾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회피는 두려움을 지우지 못한다. 다만 잠시 미뤄 둘 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망자의 77%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죽음은 집 안에서, 가족의 품 안에서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이별이었다. 죽음을 ‘치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만큼 죽음은 더 낯설고 두려운 것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숨어 버린 것이다.
동서양의 지혜는 오래전부터 이 회피를 경계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결국 “죽음을 연습하는 일”이라 했다. 하이데거는 유한성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삶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고 경고했다. 성서도 같은 통찰을 전한다.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신앙의 언어가 낯선 이에게도 이 문장의 핵심은 명료하다.
마감일이 있어야 글이 써지듯, 끝을 인정할 때 오늘 하루가 비로소 또렷해진다. 말기 암 환자를 장기 추적한 연구에서, 남은 시간을 또렷이 인식한 환자들은 가족과 화해하거나 오랜 꿈을 실행에 옮기는 비율이 높았다.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싶은 것을 떠올린 이들의 목록에는 대개 재산보다 사람, 성공보다 관계가 앞자리에 섰다.
임상심리학자 폴 웡(Paul T. P. Wong)도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더 큰 의미감과 평온을 경험한다고 보고했다. 유한성을 직시하는 것은 삶을 축소하지 않는다.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수용’일지 모른다.
신앙의 전통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길을 보여 준다. 성서는 죽음을 공포의 구덩이가 아니라 ‘잠’, ‘쉼’과 ‘귀향’으로 그린다. 긴 노동 끝에 깊이 잠들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이미지다. 믿는 이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사람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그 말이, 공원을 달리다 멈춰 선 그 밤에야 비로소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숨은 처음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돌려드리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귀향일 수 있다.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는 사도 바울의 외침은 그 확신에서 나왔다. 잘 죽기 위한 준비는 의외로 단순하다. 언젠가 못 하게 될 말을 오늘 미루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를 조금 덜 아끼는 것, 오래 묵은 서운함의 매듭을 조금씩 풀어 가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밝게, 더 가볍게 산다. 매일의 밥 한 끼가 더 맛있고, 가족과의 짧은 대화가 더 소중해진다.
그 밤, 공원을 달리다 멈춰 선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알았다. 숨은 처음부터 빌려온 것이었고, 그렇기에 오늘 이 숨 한 번이 기적이라는 것을. 손을 놓는 순간 잡혔듯, 끝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늘이 다시 시작된다. 죽음을 기억하는 용기 — 그것은 빌려온 숨을 가장 충만하게 살아내는 지혜의 또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