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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5/05/26
일산 구도시의 새 풍속도
이계준(감리교 원로목사, 연세대 명예교수)

 

일산에 온 지도 30년이다. 기획도시를 건설한 지 1년이 지난 때였으니까. 신도시가 4반세기를 지나 재건축한답시고 야단법석이니 구도시가 된 모양새다. 입주할 때는 신도시답게 쾌적하고 공간도 널찍하였으며 신촌 직장도 30분 거리였으니 이상 촌이 따로 없었다.

 

1960년도 말 미국서 귀국하여 화곡동에서 근 20년 살았다. 겨울이면 9공탄 가느라 연탄재 버리느라 난리도 저리가라였다. 그때 비하면 일산은 말 그대로 신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아파트 말고는 미국 신도시와 다름없는 매력적인 삶의 보금자리였으니까. 갓 심은 나무는 아직 덜 자랐고 모든 시설이 미비하였지만 말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정원 조성 및 건축 기술의 발전으로 쾌적한 주거지로 손색없는 완벽한 자족 도시를 이룬 것이다.

 

일산은 정발산을 중심축으로 예술 공간인 아람누리와 MBC 드라마 센터, 롯데와 현대백화점 및 국제 전시장인 킨텍스가 있는가 하면 국립암센터와 일산병원을 비롯한 대학병원들이 셋 있는 명실상부한 문화 도시다. 호수공원은 일산이 자랑하는 명물유원지로 꽃 전시장과 화원, 공연장과 트랙이 잘 갖추어져 있다. 주중에는 일산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나 주말이나 휴일에는 호수의 낭만에 금줄인 서울내기들까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우리 아파트는 한 동이 30가구로 첫 10년은 이렇다 할 변동 없이 지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동 가구가 점증하더니 지난 10년은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세대가 바뀐 것이다. 이제 기존의 주민들은 대부분 새 아파트를 찾아 떠나 대 여섯 가정만 남았고 어디선가 40대 전후의 젊은 가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노인들의 세상이었던 도시가 하루아침에 젊은이들과 아이들의 세상으로 바뀌니 생기발랄한 분위기에 들떠 나도 젊어진 듯 착각할 지경이다. 

 

현관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한다. 말로는 동양 예의지국이라며 인사성은 바닥이었는데 이제 좀 업그레이드된 듯싶다. 가난할 땐 기름기가 없어 허리 굽히기가 힘들었거나 배우지 못해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거운 전자기기를 버리려고 낑낑대니 중년 신사가 거들어 주었다. 반면에 엘리베이터에 선승한 중년 부인에게 현관에 들어오시는 할머니와 함께 가자고 했는데 혼자 올라가 버렸다. 이런 제기랄! 인사 주고받고 도움받으니 아파트 벽같이 꽉 막힌 숨통이 뚫리는 것 같았는데 이런 망동을 대하고 나니 역시나 하는 느낌이 들어 씁쓸하다.

 

젊어지는 구도시와 함께 또 하나 새 풍속도가 등장했다. 국산 고급 승용차 뿐 아니라 외제 차가 주차장 반을 차지할 정도다. 중산층 동리가 하루아침에 부촌이 된 것 아닌가! 강남 아파트 팔고 헐값에 새 둥지 틀면서 외제 차를 산 모양이다. 미국서 젊은이들이 월세 지하방에 살며 BMW 굴리는 것이 신기했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이 풍요의 절정에 올라 유복한 삶을 구가하니 대견스러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나도 팔자 펼 기회가 없지 않았다. 화곡동 20년 살이 끝내고 목동으로 옮길 때 아내가 법적으로 허용되니 노후 책으로 작은 것 하나 더 장만하자고 했다. “딴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목사가 둘 가지면 되겠느냐!”며 굴러들어오는 호박을 걷어 차버렸다. 그땐 내가 진짜 목사였던가? 지금 생각하니 천치 바보가 따로 없다.



그 뿐인가. 강남 아파트에 투자할 기회와 유혹이 한두 번 있었다. 용단을 냈더라면 지금 쯤은 벤즈는 아니라도 멋진 것 하나 굴릴 텐데 말이다. 평생 소나타를 몰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소나타를 즐겼으니 그만하면 내 팔자도 어지간했다며 자위한다. 그런데 지난겨울 아반떼로 하강한 것은 봐주겠는데 CD Player가 없어 소나타가 울리지 않으니 못내 아쉽다.


지난 30년 정든 일산을 떠나게 되었다. 일산은 이제 완전 자족 도시가 되어 편리하고 안전하니 인생의 종착역까지 앉아 뭉개도 좋을 터전이다. 노화가 들이닥쳤으니 섭섭한 들 어쩌겠는가. 80대 후반의 아내가 가사가 힘겹다며 실버타운 노래 부른지도 10년에 가깝다. 나는 여기가 지상천국인데 아내의 기력이 점점 쇠잔해 보이니 묵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사람의 건강과 행복에 내 명운이 걸렸으니 실버타운 결행이 유일의 생존 조건이 될 수밖에.


결사반대하다 불가항력적 상황에 밀려 일단 작정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인심은 조석변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자포자기인가 아니면 관용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아리송할 따름이다.

 

지난 가을 복덕방에 집을 내놓았다. 때마침 재수 없게 정부의 강남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니 집구경은 물 건너간 모양새다. 돈은 돌아야 돈인데 숨통이 막히니 어쩌겠나. 가물에 콩 나듯 나타나는 이들도 소 닭 보듯 구경 뿐이다.


하루는 40대  젊은 여인이 복부인과 함께 왔기에 또 구경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그녀의 남편이 나타나 당장 계약하자는 거다. 우리 아파트 옆 동리에서 자라 초등 학교에 다녔고 자녀가 셋이라 방 5개인 우리 집이 딱이라는 말이다. 가망이 없던 것을 당장 계약하자니 귀를 의심할 밖에. 자기 둘만의 행복이나 경제 구실로 결혼과 출산을 마다하는 해괴한 세태에 자녀 셋 둔 젊은 가정이  오겠다니 기특하고 감사만극이다. 이 참에 필요 없는 냉장고, 에어컨, 오븐과 기타 가재도구를 몽땅 젊은 가정에 기부하니 마음이 흡족하다.

 

우리 집값은 30년 전보다 4배나 뛰었고 실버타운의 값은 우리 집 값의 절반이니 대박이 아닐 수 없다. 강남 집값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나 주택연금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으니 벼락부자가 따로 없다. 가난뱅이 열등감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부자 기분에 콧노래가 흥겹다. 더욱이 경기 도민증 30년 만에 세계 10대 도시 서울 시민증을 회복하니 특권과 명예가 충천할 뿐이다. 이번 실버타운이 인생살이 마지막 풍속도일 텐데 그러고 보면 90 평생 색다른 풍속도를 구경하며 지나온 셈이다.



6.25 전쟁 때 고향 평양을 떠나 제주도 피난민으로, 학업을 위해 부산과 서울로, 유학으로 미국과 고국으로, 화곡동과 목동으로, 일산에서 실버타운으로. 이렇게 지난 일을 반추하니 인생이란 새 풍속도를 찾아 나선 관광객 같다고나 할까. 종당에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곳’, 상상을 초월하는 진풍경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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