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열 (원로목사)
세상에는 참 많은 이름이 있습니디. 사람의 이름도 있고, 계절의 이름도 있고,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들 가운데 이상하리 만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엄마 ! 참 짧은 이름입니다. 입술을 한 번 열었다 다물면 끝나는 두 글자뿐인 이름이죠.
그런데도 이 짧은 이름안에는 한 사람의 생애와 사랑과 눈물과 기도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 이름을 너무 쉽게 불렀습니다. 아프면 “엄마” 하고 불렀고, 무서우면 “엄마”를 찾았고, 배가 고파도, 속상해도, 억울해도 제일 먼저 입에서 흘러나오던 말이 바로 그 이름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왜 우리는 그 이름 하나만 부르면 세상이 조금 덜 무서워졌는지. 왜 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눈물이 그치고 마음이 놓였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늘 우리 삶의 가장 안전한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 주던 사람, 넘어지고 난 뒤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어 주던 사람. 엄마는 늘 그렇게 우리보다 먼저 걱정하고, 우리보다 더 오래 아파하고, 우리보다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의 크기를 한동안은 잘 알지 못합니다. 엄마가 왜 늘 같은 옷을 오래 입었는지, 왜 당신 것은 대충 넘기면서 자식에게는 좋은 것 하나 더 쥐여 주려 했는지, 왜 밤 늦게까지 기다리면서도 정작 자신은 괜찮다고 웃었는지 우리는 대개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어느 날 문득 엄마의 손을 잡다가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릴 적 내 볼을 감싸던 그 손이 어느새 거칠고 가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손마디마다 살아낸 시간의 흔적이 박혀 있고, 그 주름 마다 말하지 못한 수고와 인내가 스며 있었습니다.
그제야 알게 됩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온 수많은 날들 뒤에 엄마의 잠 못 이룬 밤들이 있었음을. 내가 쉽게 받아 누렸던 평범한 하루하루 뒤에 엄마의 기도와 눈물이 숨어 있었음을.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엄마”라는 이름은 점점 다르게 들립니다.
예전에는 그 이름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처럼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 이름 자체가 한 편의 긴 기도문처럼 들립니다. 부르면 따뜻한데, 부르면 안심이 되는데, 이상하게도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 한편이 먹먹해 집니다. 아마도 그건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서 일 것입니다.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얼마나 많이 포기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는지를.
세상에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아껴 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부터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끝까지 사랑해 준 사람, 그 이름은 대개 엄마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그 사랑을 다 갚지 못한 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갚을 수 없는 사랑이기에 더욱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문득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엄마 !
필자 나이 80 중반인데, 그 이름을 부르면 어린 날의 골목길이 떠오르고, 늦은 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빛이 떠오르고, 내가 아프던 날 이마 위에 머물던 따뜻한 손길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젖어 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이름이지만, 가장 오래 남는 이름 ! 가장 흔하게 불렀지만 가장 깊은 뜻을 가진 이름! 부를수록 먹먹해 지는 그 이름, 그래서 끝내 끝내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이름 ! 엄마 ! 그 이름은 한 사람의 호칭이기 전에 내 인생이 받은 가장 크고 깊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찔레꽃 어머니’ (김명자 시)
오월이면 하얗게 핀 찔레꽃
어머니가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엄마 ! 하고 불러보지만
대답 대신 하얗게 웃는다
언제나 머리에 쓰던 하얀 수건
엄마는 왜 맨날 수건을 쓰고 있었을까
묻고 싶었지만
찔레꽃 향기만 쏟아진다.
(2025년 제2회 어르신 짧은 시 공모전 최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