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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5/13/26
[기고] 욥기에 전개된 인류구원의 비젼(Vision)
–고난 속의 욥이 그린 구원의 비젼-
마이클 송(전 동서성서학회 초역위원)

 

서문


많은 이들이 욥기는 고난 중에 읽는 성경이라고 말한다. 아니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욥기 읽기를 권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그래서 욥기를 펼쳐 들고 읽기를 시작한 이들은 또 다른 절망 속에 빠진다. 세상에, 이 성경을 번역한 이들은 실로 무슨 말씀인지 내용을 이해하고 번역했는가? 번역자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을 어찌 이해하라는 말인가고 한탄할지 모른다. 요즈음의 개역개정성경은 그래도 좀 낫다. 옛 개역한글성경으로 욥기를 접했던 나는 실로 절망적이었다. 그 한글 성경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읽던 영어성경 NIV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읽기가 어렵다는 말은 어떤 구절들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고, 때로 어떤 구절들은 전후관계상 연결 지어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더라는 말이다.


그때 샌프랜시스코 베이지역의 어느 목사님께서 내게 Jerusalem Bible(JB)이라는 엄청 두꺼운 성경책을 한 권 주셨다. JB는 1985년에 출판된 NJB(The new Jerusalem bible)의 구판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성경이기에(공동번역의 원문) 가경이 포함되어 엄청 두꺼웠다. 기억하기에 JB의 욥기는 NIV에 비해서 훨씬 읽기가 쉬웠다. 내가 성경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시에 욥기를 읽을 때의 고충 때문이었다. 내가 최초로 번역을 시도한 성경도 욥기였다. 25년 이상 세월이 흐르다 보니 당시 열심히 번역했던 욥기 원고는 5.25인치, 3.5인치 플로피디스크, CD, USB, 그리고 외장하드로 옮겨오는 PC 메모리의 발전 과정 어디에선가 없어져서 찾을 수가 없다.

 

욥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뿐 아니고 고대의 사람들에게도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이었을 것이 확실하다. NIV Study Bible의 욥기 서문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에 72명의 유태인 번역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72일간 번역했다는 70인역(Septuagint)이라고 불리우는 최초의 그리스어 번역성경의 욥기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줄 수가 무려 400줄이 적다고 한다. 70인역 번역자들도 번역이 어려운 특이한 단어들과 문체와 내용을 접하고는 자주 당혹했고, 그래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줄들은 빼먹고 번역했다고 추정된다.

 

욥기는 내용적으로도 쉽게 읽어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이 아닐뿐 아니라, 전반적 내용에 대한 신학적 분석에 있어서도 평신도들에게는 신정론(Theodicy)이니 뭐니 이해하기 힘들다. 과학에 있어서의 ∼론(論)은 많은 이론이 있는 자연현상의 해석을 단순화해서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반면, 인문∙사회∙종교에 있어서의 ∼론은 거의 언제나 론 자체의 의미부터 이해부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글은 욥기를 읽는 평신도들에게 신학적 논리가 아닌 기독교의 보편 교리 안에서 욥기에 대한 증진된 이해를 나누자는 목적의 글이다.

 

욥기의 시대적 배경은 주전(B.C.) 2000-1000년이라는 광범위한 기간의 어느 때로 본다(NIV Study Bible의 욥기 서문). 어떤 이들은 욥이 살았던 시대를 바벨탑 이후 아브라함 이전 혹은 아브라함과 동시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는 200여년을 살았고, 아담에 관하여[31:33] 또 노아의 홍수에 관하여[12:15]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성경은 욥이 신화나 전설의 주인공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임을 구약과 신약에서 명확히 한다[겔 14:14, 약 5:11]. 에스겔서에서는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의인으로, 야고보서에서는 인내에 있어서 상징적 인물로 언급되었다. 여기서 인내의 사람이라는 말은 그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본 욥은 당시 그 지역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NIV와 NASB가 흠없다(blameless)라고 번역한 곳을 KJV는 완벽하다(perfect)로 번역했다. 즉,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완벽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사탄이 본 하나님과 욥과의 관계는 하나님께서는 욥의 재산을 지켜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욥은 그 댓가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서 서로 축복과 섬김을 주고 받는 관계였다. 구약의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절대복종하여야 할 대상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욥의 재산을 보호해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을 축복해 주시니 욥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앞에 정직하며 흠 없으며, 악을 떠난 자로 살았다고 주장한다. 영어성경들의 ”fear god for nothing?“[1:9]의 의미는 ”댓가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의 의미이다. 욥의 신앙이 하나님과 댓가를 나누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구약적 심판 - 현세심판


욥기는 일곱 아들과 세 딸, 수 많은 양과 낙타와 소와 암나귀, 그리고 많은 종들을 소유하고 있는 욥을 하나님께서 사탄이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시어서 욥의 신앙이 시험(test)당하는 이야기이다. 욥에게 닥친 재난은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로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는 가운데 욥의 자손들과 종들과 재산도 피해를 보는 그런 재난이 아니고 단지 그의 자손들과 종들과 재산 그리고 그의 육체를 콕 집어 대상이 정해진 표적 재난이었다. 오늘의 세상에서도 마치 표적 재앙과 같은 재난을 입는 신앙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반문할 것이다. “아니, 왜 내게 이런 재난이. . . ? 내가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게 이런 재앙이 내게 닥치는가?”

 

경악스러운 재앙과 신체의 훼손을 당한 참혹한 몰골의 욥을 본 그의 세 친구들은 밤낮 7일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있었다고 했다[2:13]. 그 일주일 동안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들 중에서도 가장 의롭다고 생각했던 친구 욥의 비참한 현실을 본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어지는 대화 내용을 고려할 때, 그들은 어찌 욥을 위로할까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욥에게 닥친 재난의 원인과 이유를 당시 그들이 가졌던 일반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의 관점으로 해석하려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선한 사람이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역설이었을 것이다. 선한 사람에게는 재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이 땅 위에서의 인생에 대한 보상과 처벌은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당시로는 평범한 진리이고 철칙이었다.


이는 신 28장과 레위기 26장으로 분명하게 보인다. 신명기 28장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으로 시작되는 1-14절의 축복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으로 시작되는 15절-68절의 저주로, 이러한 축복과 저주는 역사적으로 사사기와 열왕기들에서 실제로 시행되었다. 선지자들의 예언서에서도 같은 노선의 구약적 사상이 보여진다. “심판의 날”에 있어서와 같이 “심판”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면, 사람이 생전에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을 생전에 받는 것은 현세심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욥기의 결론 역시 현세심판을 정당화한다. 42장 마지막부분은 구약의 현세심판에 맞는 욥의 인내의 신앙에 대한 현세적 축복으로 결론을 맺는다[42:12-17]: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2)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이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욥의 아내에 대한 내용을 보지 못한다. 그의 140년의 축복의 인생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준 아내는 옛 아내가 아닌 새로운 아내였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 있어서나 지금이나 처벌의 경중은 죄의 경중에 따른다. 욥이 겪고 있는 혹독하고 처참한 처벌을 생각할 때, 그의 죄도 그에 필적하는 엄청난 죄임이 분명하다고 욥의 친구들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가졌던 현세심판론에 따르면, 욥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였다면, 결코 이러한 재난이 그에게 닥칠 리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재난을 당한 친구에 대해서 위로자가 아닌 고발자요, 죄를 기소하는 검사요, 재판자로 등장했다. 그들은 욥이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같은 의인이 아니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욥의 아내도 인정하지 않는 욥의 의를 친구들이 어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욥의 친구들의 그러한 입장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처벌과 그에 따른 욥의 고난을 정당화하는 입장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죄 없는 자를 벌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의 생일, 생명, 그의 어머니의 수태, 출생을 저주하는 욥에게 그들은 일주일 동안 그들이 생각해 낸 재난의 원인으로 엘리바스를 시작으로 4장부터 욥을 공격하고 이에 대해서 욥은 반박하는 대화가 마지막 42장까지 이어진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욥의 친구들의 공격의 주된 논지는 하나님의 현세심판이다. 세상만사에 하나님께서 일일이 개입하시고 악인은 망하게 하시고 의인은 축복하신다는 현세심판론이 그들의 주요 논지이다. 그래서 그들은 욥에게 닥친 재앙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는 징계로 확신한다[5:17]. 그리고 고통하는 친구에게 복이 있다는 모순적 축복의 말을 전한다: 17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너는 의롭지 못해서 징계 중이니, 행복한 줄 알고 입 닫고 그냥 고난을 겪어라“가 엘리바스 의 위로이다. 얼마나 이율배반의 잔혹한 말인가? 우리가 가진 오늘의 신앙에는 미래의 축복이 있으나, 당시의 신앙인들에게는 내세도 부활신앙도 없는 상황인 것을 생각할 때 고통받는 자에게 무슨 복이 있다는 말인가? 이는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4]“라는 논리적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도록 오역한 공동번역 산상보훈의 “행복”을 연상케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그에게 믿음이 있던 없던, 종교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던 간에, 인생에 어떤 치명적 불행이 닥치면 “혹시 내가 잘 못 살아서,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내게 재앙이 온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해보는 것이 동서양 모두에서 인지상정이다. 객관적으로 재난을 당한 이를 보는 이들의 생각도 오늘의 사람들과 욥의 시대의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이의 재난을 보고, “그는 욕심이 과도한 사람이야! 그의 탐욕의 결과야!”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욥의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은 의심할 바 없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욥기에서 발견하는 가장 주요한 논지는, 참혹한 재앙 속의 욥은 결코 자신에게 온 재난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하나 그의 친구들은 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신봉하는 현세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4장]. 그는 신약성경의 심판의 날을 개념적으로 제시했다[24:1]: 1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그의 이러한 생각은 신약에서 “심판의 날“로 이루어졌다.

 

아마도 엘리바스의 위로를 기대했을 것으로 생각한 욥은 그의 공격에 실망한다[6:14-15]: “14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이미 아내 마저도 떠난 욥에게 형제가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는 동정심조차 없는 친구들에게 그는 애원한다[6:21-23]: “21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그의 말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요, 목숨을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너희는 동정심을 가지고 위로의 말도 한마디 할 수 없는가?”하는 말로 친구들을 반격한다.

 

그렇다. 어떤 인생이 재난을 당하면, 그의 형제도 떠나고, 아내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할 수 있다. 아니 재난 속의 남편이나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나는 이들도 있다. 욥의 아내도 욥을 저주하고 떠났다[2:9]: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오늘날에도 수 많은 엘리바스가 재난 당해서 고통 속에 있는 친구를 짓밟는다. “망한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야! 그는 인격적 결함이 있어!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한다. 어떤 이가 내게 말했다. 인생을 좀 살고 보니 내 주변에 나를 축복하고 나의 성공을 빌어준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드러내지 않고 내가 망하기를 염원해 온 형제와 친구들도 있었고, 그들은 나의 불행을 보고 속으로 즐기고 고소해 했다네.

 

동양과 서양 모두에 있어서, 과거에 있어서나 오늘에 있어서나 우리는 선한자가 재난을 겪다가 죽는 것도 목격하고, 악한자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 것도 목격한다. 현세심판의 이러한 현상적 괴리와 모순은 인간의 죄가 그 자손에게 미친다는 연좌적 처벌(collective punishment)로 해석되고 정당화되기도 한다. 즉 현세심판의 연장선상에서 아비와 어미의 죄가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정당화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고난에 처한 이들을 이웃으로 대한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심판자적이고 구약적인 자세로 그들을 대할 수도 있겠고, “위로”라는 전혀 다른 자세로 그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세심판이라는 구약적 상황판단은 절대 부정되어야 하는가? 노년이 되어 인생을 좀 산 이들은 사탄의 시험은 오늘도 활발하며, 많은 이들이 사탄의 유혹과 시험에 걸려 넘어져서 사탄의 도구로 살다가 패배한 인생들이 있음을 시인한다. 또한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낸 승리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과 욥 간의 존재론적 차이(Difference)[9:32-35]

욥기와 관련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existential difference)는 신학이나 철학이 말하는 바와 같이 “자존적 존재 (Self-existent being)”니 “의존적 존재 (Dependent being)”니 하는 말이나, “시공의 제약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과 유한하고 물질적이며 시공의 한계 속에서 사는 인간“의 대조와 같은 어려운 말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욥은 단순히 자신이 만나서 마주 보고, 그가 당하고 있는 재난과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변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영혼과 함께 육체를 가졌다[32:8]. 인간은 하나님을 마주 보고 만지고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욥이 제기하는 존재론적 문제이다. 욥이 그의 친구들 앞에서 고백하는 고통은 존재적 차이로 인해서 그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겪고 있는 처벌의 부당함을 알리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출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런 상황 속에서 욥은 구원에 대한 자신의 비젼을 전개한다.

 

관계로 인한 인간의 모든 고난과 고통과 재난은 욥의 시대에 있어서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집단 간의 어떤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 차이는 추구하는 가치, 이념, 사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들과 피부색, 모양 등의 형이하학적 요소들의 차이가 관계에 있어서의 고통과 재난의 원인이 된다. 개인과 개인 간에 어떤 차이가 있어서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 높여 논쟁한다고 해서 언제나 이해와 화해와 화합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화해와 화합이 없는 경우, 개인 간의 폭력이나 사법적 고소가 횡행하고, 그 차이가 집단적인 경우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 인간의 내부적 고통에 있어서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언제나 고통과 재난의 원인이 된다. 언제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없는 현실도 고통의 원인이다. 언제나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양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도 고통과 재난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인생은 만나고 헤어지고 그로 인한 고통을 겪는다.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와 나라에 있어서의 개인적, 가정적, 공동체적, 국가적 고통과 재난은 언제나 어떤 차이로 인해서 야기된다. 세상의 보편적 가르침은 그 어떤 차이(difference)도 사랑과 타협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하나 사실상 세상만사가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존재론적 차이가 없는 인간들 간에도 아무리 소통한다 할지라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존재론적 차이가 있어서 대화를 통한 소통이 불가능한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에 있어서랴?

 

욥은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출 33:20]. 따라서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무죄를 탄원할 기회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욥의 비젼은 첫째로 존재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욥 사이를 중재하고 판단할 제 삼의 존재를 필요로 했다. 두 번째로는 구약 신앙의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죽음의 염려 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는 [9: 32-35]에 잘 드러나 있다: 32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개역개정성경의 “판결자”는(33절) 영어성경들에서는 중재자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중재할 사람(someone to mediate(NIV)), 중재자(daysman(KJV), arbitrator/arbitor(NASB/NJB)). 이들 어휘들은 모두 “중재자”의 의미이다. 이중 arbitrator와 arbitor는 사법적 용어로 영국과 미국의 법에는 중재법(arbitration law)이라는 법이 있다. 때로 계약 당사자들은 계약 중 상호 간에 분쟁이 발생할 시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법정을 통한 해결을 피하고 중재자에 의한 해결을 약속하는 구절이 있다. 영∙미에서 중재법에 의한 판결은 사법적 효력을 가진다.

 

고난 중의 욥의 첫 단계의 구원의 비젼: 중재자 그리고 담보물[16:19-20]

하나님과 인간 간의 존재적 차이의 해소 방안으로 중재자를 생각한 욥은[9:32
-35] 더욱 구체화된 어휘들로 구원의 비젼을 제시한다. NIV의 욥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데 실패한 욥의 말에서 중재(중보)자(intercessor)라는 어휘가 최초로 발견되는 곳은 [16:19-20]이다. 거기서 욥은 그의 의의 증인(witenss)과 그의 변호자(advocate)가 하늘에 계신다고 주장한다(NIV, NASB). Intercessor는 그의 편에서 하나님께 간청하는 이의 의미로, NJB는 이를 내 생각의 해석자(Interpreter of my thoughts)로 번역하였다. KJV와 NASB는 친구들(friends)이라는 복수로 번역하였다.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의 차이로 욥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억울함을 마주 보며 고백할 수 없지만 그의 변호자가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입장을 하나님께 전달해 줄 그 중재자에게 억울함을 부르짖는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존재론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중재자라는 것을 욥은 고난 중에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개역개정 21절의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있어서의 ”인자“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인자(예, 에스겔서의 son of man)이나 신약의 정관사가 있는 인자(the Son of man)와 다른 의미이다. NIV, KJV, NJB는 그냥 ”한 사람(a man)”으로 번역했고, 단지 NASB만이 부정관사를 붙여 “a son of man”으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역개정의 인자는 혼란을 야기하는 오역일 것이다. “(어떤 한) 사람”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의 차이로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이 처한 문제의 해결에 실패한 욥의 최초의 구원의 비젼은 자신의 죄 없음을 보증할 보증인이고 담보물(pledge)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위하여 보증인이 되시고 담보가 되어 주실 것을 요구한다[[17:3].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도 잃고, 아끼던 종들도 잃고, 사랑하던 형제들과 친척들에게도 버림을 받고, 아내도 떠나고, 주위에는 오직 비웃고 질시하는 이들로 둘러쌓여 있으며, 아무런 재산도 없이, 살은 부스럼으로 썩어가며 죽은 자들의 세계를 눈앞에 둔 상황에 친구라는 이들도 위로는 커녕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재판관이 되어 그를 죄인으로 질타하고 비판하는 상황에서, 그의 무죄를 보증하고 담보해주고 변호해줄 이는 이 세상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욥은 유일하게 자신을 변호해 줄 이, 자신을 위해 담보물을 제공하고 보증이 되어주시고(pledge(NIV)/surety(KJV)/guarantor(NASB)) 고난에서 해방시켜 주실 이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확신한다[17:3]: 3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개역개정),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내 보증이 되어 주십시오. 내 보증이 되실 분은 주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공동). 욥이 원한 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주시기를 소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알게 된 바는 욥의 시대로부터 이천년 혹은 천년 후에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가지신 하나님이 오셔서(theophany) 이 땅 위에 서서 걸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의 구원의 담보가 되시고 보증이 되셨다는 것이다.

 

고난 중의 욥의 두 번째 단계의 구원의 비젼: 이 땅에 오실 대속자[19:25-27] 그리고 부활

[17:3]의 “담보자, 보증자”를 통한 구원에 대한 욥의 비젼은 [19:25-27]에서 대속자(개역개정), 후견인(공동), 구원자(표준)로 번역되었고, 영어성경들에 있어서는 대속자(my Redeemer(NIV, KJV, NASB)), 살아계신 변호자(a living Defender(NJB))로 더욱 구체화된다. 그 대속자는 하나님과 욥의 존재의 차이로 인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이 땅위에 오실 것으로 구체화하고 확신한다: 25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개역개정). 여기서 개역개정의 “내가 알기에는”은 영어성경들 모두에서는 “I know that∼”, 즉 “나는 ∼를 안다”로 그 어조가 확신적이다. 그의 구원의 비젼에서 그를 대속하실 이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계시며, 이 땅에 오실 것이며, 육체를 가져서 욥이 볼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영어성경들의 이들 구절에 있어서 NJB를 제외한 세 성경들은 모두 redeemer(대속자)로 번역하였다. 즉,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욥기에서 대속자(redeemer)라는 개념으로 번역되었고 그러한 구원의 비젼이 고난 중의 욥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의 구원의 비젼은 이천년-천년 후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그 대속자는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이 땅 위를 걸으셨으며, 그는 하나님이시며, 그를 보고 말씀을 듣고 만진 이들이 있었으며, 그와 함께 했고 또 목격한 이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하였으며, 그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이 되셨다. 부스럼으로 죽어가고 썩어가는 피부를 가진 욥이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는 육체의 부활을 암시할(allusion) 것이다. 26절의 “in my flesh I will see God(NIV)/in my flesh shall I see God(KJV)/from my flesh∼(NASB)”의 육체(flesh)는 부활한 육체를 의미할 것이다. 27절의 my own eyes(NIV), mine eyes(KJV), my eyes(NASB, NJB)의 눈은 부활한 육체의 눈이 아니겠는가? NIV 26-27절 전반절을 직역해보자: 또한 나의 피부가 파괴된 후에, 그럼에도 나는 내 살 속에서 하나님을 뵈오리니, 내 자신의 눈으로 그를 보리라∼. 욥이 하나님을 뵙는 것은 영어성경들의 시제에 따르면 미래의 일이다. 욥기에서 전개된 구원의 비젼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으로 실현되었고 또 수천년 시대를 뛰어넘어 그가 부활하신 육체로 존재론적 차이 없이, 또한 하나님을 뵙고 죽을 염려 없이 그를 볼 그 때까지 이르는 그의 구원의 비젼을 확장했다. 고난 속의 한 사람 욥이 그린 구원의 비젼은 오늘의 우리를 거쳐 미래의 심판의 날까지 확장되었다.

 

엘리후에 의해서 더욱 구체화된 구원의 비젼[33:23-30] – 육체의 부활

23절의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를 읽으며, 많은 이들은 영어성경들의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Angel of the LORD(히브리어: מַלְאַךְ יְהוָה mal’āḵ YHWH "messenger of Yahweh")로 표현된 존재(figure)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성품, 목적, 그리고 대속의 계획을 드러냄으로 인간세계와 거룩하신 하나님 간의 가교로 작용하였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사자(messenger)가 아니고 때로 하나님의 권위로 또 하나님 자신으로 행위했다. 그는 하나님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사이에서 사탄의 비난에 반대하는 중재자(intercessor)로 일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믿는자들의 옹호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술 내용과 일치한다[슥 3:1-10]. 역사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그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theophany), 성육신 이전의(pre-incarnate) 그리스도의 모습, 삼위일체의 두 번째 하나님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

 

23절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번역은 NIV일 것이다: 만일 수천의 천사 가운데 그들의 편에 선 천사가 있어서, 그들이 어찌 바르게 될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보내진다면(sent to tell them how to be upright). 오늘의 우리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엘리후에 의해서 구체화된 구원의 비젼은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을 넘어 죄인의 용서와 부활로 그 범위가 넓혀진다: 24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여기서 대속물은 4 영어성경 모두에서 ransom으로 번역되었다.

 

같은 23절의 개역개정성경에는 “중보자(仲保者)”라는 어휘가 발견된다.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는 중보자의 개념이 보이지 않는다. 영어성경들에 있어서도, NIV와 KJV에서는 중보자의 개념을 가진 어휘 대신에 사자(NIV, messenger)/번역자(KJV, interpreter)로 번역하였으나, NASB와 NJB에는 각각 interceding angel과 Mediator라는 어휘로 중재자의 개념이 명확히 반영되었다. 중국어성경들에 있어서, 신천성서는 KJV와 같이 번역자(翻譯者)로 번역했다: 若同之有一使者、一翻譯者、即在千中見擇之一者、以示人知神之公義、이에 반해서 중국어화합본은 “傳話的與神同在”로 번역했다: 一千天使中,若有一個作傳話的與神同在,指示人所當行的事.


그 의미는 “전설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이가 있어서“의 의미일 것이다. 특기할 점은 중국어성경 신천성서와 중국어화합본 모두에서 우리는 중재(仲裁)/중보(仲保) 혹은 중재자/중보자라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번역자들이 중국어성경을 그냥 베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욥기에 있어서는 같은 구절의 의미가 번역자에 따라 다양한 경우가 많다. 공동번역에 대하여 한 가지 지적할 바는 NJB의 Mediator(중재자)를 그들의 번역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동번역의 원문인 NJB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원문을 무시한 분명한 오역이다.

 

25절의 육체의 부활을 거쳐, 30절의 생명의 빛을 통한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구절은 모두 죄인의 구원에 관한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주 예수의 대속의 피흘림으로 죄를 씻는 구원이 구체화되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24절의 대속에서 25절의 육체의 부활 26절의 하나님의 의의 실현 27절의 죄의 용서, 30절의 생명의 빛(the light of life(NIV, NASB)/the light of the living(KJV/NJB))에 의한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29절의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개역개정)“ 혹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공동)“에 관하여 NIV Study Bible은 [욥 5:19, 40:5, 잠 6:16, 30:15, 18, 21, 29, 전 11:2, 암 1:3, 6, 9, 11, 13, 2:1, 4, 6, 미 5:5]을 참고 구절로 제시한다.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와 영혼을 가진 인간 간의 존재론적 차이로 인한 문제로 고통하던 욥의 문제는 담보/보증자, 대속자, 그리고 중재자의 비젼을 통해서 구체화 되어 하나님께 전달되었다. 살면서 죄를 지은 인간은 반드시 살아있는 동안에 징벌을 받는 것으로 믿고 있던 시대에, 하나님의 징벌이 두려워서 의를 추구하던 시대에, 그래서 하나님은 온통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시대에, 재난속의 욥은 중재자를 꿈꾸었고 그 중재자는 엘리후에 의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대속자 예수의 탄생을 구체화된 예언으로 주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사 7:14, 마 1:23].

 

오늘의 세상에서, 교회 내에서이든 밖에서이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욥과 같은 의인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고 믿는 이는 드물지 모른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온통 부패했고, 썩었고, 의에 대해서 눈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시대에 의인 7000을 남겨 두신 하나님께서[왕상 19:18] 이 시대의 세상도 사랑하실진대, 오늘의 부패한 세상에도 의인 7백만 혹은 7천만을 남겨두시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개눈에 뭣만 보인다고, 우리의 눈이 부패해서 부패한 것들만 보이는지 누가 알겠는가?

 

욥의 구원의 비젼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인간이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는 육체를 지닌 중재자였다. 그 중재자는 오셨고,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될 수 있는지를(how to be upright) 말씀하셨고, 부활하셨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밝히신 구원의 도를 따라 사는 구도자들이다.

 

맺는 말씀:

신약은 인간 욥이 고난과 고통 중에 바라던 구원에 대한 비젼이 실현된 실상이요 증거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욥기를 읽으며 어떤 이는 종아리를 걷고 아버지에게 회초로 매를 맞는 아이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이던 예전의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통을 이기고 참았지만, 오늘날의 아이들은 악을 쓰고 반항할지 모른다. ”왜 때려요? 무슨 잘못을 했다고 피가 나도록 매질을 하시나요? 경찰에 고발할 거예요!“ 세상을 유지해온 가치와 지혜의 뿌리까지도 흔들리는 반항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간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와 지혜를 지켜온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대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거부의 역사였다[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끊임 없이 반항하는 철 없는 아이와 같은 이스라엘과의 소통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도 존재론적 차이로 인한 답답함이 있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여기서 ”변론하자”는 문제를 해결하자(settle, NIV), 따져보자(reason, KJV), 논쟁해보자(debate, NASB), 토론해보자(talk over, NJB)의 의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변론의 제안은 700년 가량이 지난 후 드디어 실현되었다. 때마다 선지자를 세워서 이스라엘과 소통하시던 하나님은 빗나가는 자식과 같이 반항적인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 700년 가량 중 500여년 간 선지자도 예언도 폐하여 대화를 끊으신 암흑기가 지났을 때, 의로운 자 욥이 고난 중에 그렸던 구원의 비젼을 실현시켜 주셨다. 그가 보내신 중재자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생의 고난을 함께 겪고 보셨고, 많은 이들을 만나셨고, 교회 지도자들과 토론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장사한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베드로와 12 제자들과 5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셨고[고전 15:6],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승천하심으로 인류의 새역사를 시작하셨다.

 

부정할 바 없이, 욥기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인내이다. 고난과 인내의 관계를 우리는 [롬 5:3-4]에서 발견한다: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연단(鍊鍛)이라는 어휘를 중국어성경들에서도 찾을 수 없다. KJV를 제외한 영어성경들에서, 연단에 해당하는 어휘는 “perseverance“로 번역되었다. 옥스퍼드 사전은 이 어휘의 의미를 ”persistence in doing something despite difficulty or delay in achieving success“로 설명한다. 이 어휘의 우리말 의미는 ”참는 성품“, 즉 ”참을성“이다. 공동번역은 그 의미를 개역개정이나 표준새번역 번역자들보다 좀 더 고심해서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로 번역했다. 욥은 그 참을성(인내심)으로 그가 더불어 살아온 하나님의 의를 입증했다.

 

욥기의 또 다른 주제 중의 하나는 [롬 5:4]의 ”소망(hope)”이다. 극단의 고난 중에서 욥은 중재자의 소망, 즉,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 앞에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 실현된 소망을 살고 있다.

 

여러 해 전 미치 앨봄(Mitch Albom)이라는 이가 그의 은사인 사회학교수 모리 쉬와츠(Morrie Schwartz)와의 대화에 기초한 회고록인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들(Tuedays with Morrie)”에서 모리는 욥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너무 심하셨다“고 말했고 많은 이들이 그의 말에 공감하고 그의 말을 그들의 글에 인용했다. 그러나 욥의 인내의 희생으로 인류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하는 이들은 욥의 고난에 대해서 그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로 받아들일 때, 욥의 인내를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실현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욥기를 읽을 준비가 될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아버지의 섭리로 받아들이신 주 예수의 자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다[사 53:7, 행 8:32]. 우리가 대하는 인생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받을 자세가 준비될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유혹과 시험과 고난에 대하여, 말씀은 우리가 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고전 10: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누가 주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피흘림의 구원에 대해서 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왜 꼭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야만 했는가? 하나님께서 독생자에게 너무하셨다“라고 불평하겠는가? 그의 고난과 희생으로 인류는 구원의 길 위에 놓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걸 은혜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욥의 관계를 주고 받는(give and take) 관계로 왜곡하고 시험하였으나 실패한 사탄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도 유혹하여 시험하였으나 실패하였다[마 4:3-10]. 오늘을 사는 우리도 상시로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아니 유혹과 시험이 난무하는 영적 전쟁터 속에서 살고 있다. 누군가가 지독한 인생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성실했던(faithful) 욥을 욥기를 통해서 만났다면, 그가 소망한 구원의 비젼을 보았다면, 위로받지 않을 이가 누구이겠는가?

 

욥도 다른 믿음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고난 중에 자신이 그린 구원의 비젼이 성취되는 것을 멀리서 믿음으로 바라보고 누구보다도 더욱 기뻐했을 것이다[히 11:13]. 하나님께서 더욱 많은 것으로 그를 축복하셨지만, 그는 이 땅에서의 삶이 타향살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았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00∼4000년 전을 살았던 욥은 말할 수 없는 재난과 고난 속에서 구원의 비젼을 확신적인 믿음으로 꿈꾸었고 그 비젼의 일부는 이미 인류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고 나머지는 더욱 구체화되어 실상으로 닥아오고 있다. 욥이 그리워했던 중재자가 세상에 오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났고, 그의 말씀을 들었고, 그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되는 길[33:23]을 선포하셨고(NIV, KJV, NASB),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들었던 증인들이 기록한 말씀을 읽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재림과 부활을 믿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떤 고난과 절망 속에 있는 이에게라도 욥기가 주는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욥과 같이 표적 재앙을 당했을지라도, 구원을 꿈꾸자! 우리에게는 욥에게 없던 중재자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가? 그를 믿음으로 욥의 구원의 비젼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실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비젼으로 욥기를 읽으면, 욥기는 고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 넘치는 위로가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자와 피조물간의 존재론적 차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중재자였다. 창조자가 피조물을 위하여 보증이 되셨고, 담보가 되셨고, 중재자가 되셨고, 대속자가 되셨고, 구원이 되심으로 그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그게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이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지혜는 중재자이고, 용서이고, 부활이었다. 역사(history)를 His Story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그게 인류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일 것이다. 그게 욥기가 잠언이나 전도서와 함께 지혜문헌으로 일컬어지는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욥기가 제시하는 바 인류 최고 최선의 지혜가 다름아닌 구원이고, 중재자이고, 사랑이고, 부활이 아니었는가?

 

욥기에 따르면, 욥은 이 땅에서 죽어 무덤으로 가기까지 그에 대한 시험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에 의해서 수행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욥의 시대에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던 사탄은 오늘날에는 스스로 믿는자를 유혹하고 시험한다. 욥은 초인적 인내로 결코 하나임을 원망하지 않고 그의 믿음을 입증했고, 그가 고난 중에서 그려낸 구원의 비젼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계획으로 승화되었고 실현되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고난과 참사가 있다한들, 욥이 당한 고난과 비교되겠는가? 욥은 그의 고난의 원인도 이유도 배경도 알지 못하고 그 혹독한 고난을 인내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재난과 고난의 성격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인류구원 역사의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우리가 겪는 재난과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 고난이 알곡이 되기 위해 겪는 여름의 뜨거운 햇빛임을, 영적 전장에서 겪는 훈련이고 시험임(tests)을, 그리고 그 시험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난에의 참여임을 익히 알고 겪어야 할 것이다[벧전 4: 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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