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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5/23/26
냉소적 손절을 넘어
권혁인(산타클라연합감리교회 목사)

 

요즘 세상을 이름하여 ‘손절’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서점가에는 고통스러운 타인과 거리를 두고 고독의 성채를 쌓으라는 쇼펜하우어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문장들은 단호합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이며, 타인은 그저 내 평화를 깨뜨리는 소음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청년들은 그 염세의 그늘 아래서 안식을 찾습니다. “피곤하게 살지 말자”는 구호가 정당해 보일 정도입니다. 나랑 말이 안 통하는 친구, 성향이 다른 동료, 돈 안 되는 인연들을 가차 없이 쳐내고 나면, 내 삶은 비로소 단정하고 깔끔해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가위질의 끝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타인을 손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암묵적으로 이렇게 전제합니다. ‘나는 손절당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남을 자르는 그 서슬 퍼런 가위를 내 안으로 들이대면, 과연 나는 무사할 수 있을까요? 내 머릿속의 비루한 생각들과 비겁한 욕망들을 여과 없이 스크린에 올린다면, 나를 손절하지 않을 이가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사실, 가장 먼저 손절당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모자라고 부끄러운 존재인 까닭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바로 그 부끄러움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복음의 정수는 ‘세련된 고립’이 아니라 ‘투박한 동행’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손절의 명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손절 당해 마땅한 것들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밭의 가라지를 당장 뽑아버리자는 종들에게 “가만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귀한 밀까지 상할까 염려하신 것이지요. 인생은 밀과 가라지가 뒤엉켜 자라는 밭이지, 잘 가꾸어진 인공 정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냉소적 지혜를 넘어, 복음의 과분한 은혜를 입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한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이미 탕감 받은 사람은, 타인의 작은 빚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손절당하지 않았음을 알기에, 나 또한 타인을 함부로 가위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견해가 다르고 취향이 고약해도, 저 인간이 내 인생의 평화를 깨뜨리는 가라지처럼 보여도, 그와 함께 길을 걷는 능력이 곧 신앙의 힘입니다.


인생은 원래 피곤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도,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몸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물론 손절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건강한 경계가 필요하고, 독이 되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절을 삶의 유일한 지혜로 삼는 것, 수고로운 공존을 회피하기 위한 손쉬운 탈출구로 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고통 없는 고립을 택하기보다, 고통스러운 공존을 견디는 사람입니다. 내 안의 가라지를 견뎌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닮아, 타인의 가라지와 함께 늙어가는 것. 그것이 쇼펜하우어의 비관을 이기는 기독교적 낙관이며, 이 건조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품격입니다.

 

가위를 내려놓고, 다시 밭으로 나갈 일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바람에 흔들리는 그 어지러운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피할 수 없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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