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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6/30/26
냉면 타령
이계준(감리교 원로목사, 연세대 명예교수)

 

  1. 나는 평양산이다. 거기서 태어나 6.25 전쟁 때 월남했다. 평양은 명산 모란봉과 나란히 흐르는 대동강으로 빼어난 경관과 함께 전통 음식 중 냉면을 최고로 자랑한다. 만두와 빈대떡(북한 사투리로 지짐이)도 있으나 냉면의 졸개에 속한다. 어릴 때부터 냉면 광이어서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시내 목욕탕에 다녀올 때는 보통강 다리 건너편 대동면옥에 들리곤 했다. 부모님이 심부름 보낼 때 냉면 값도 주곤 하셨다. 수년 전 폐업하였으나 미국 뉴욕과 뉴저지에서 성업 중이던 대동면옥은 후배 김 사장이 선친에 이어 경영하던 냉면집이다.


모든 냉면집 식탁 위 항아리만 한 주전자에는 육수가 가득 차 있다. 손님들은 냉면이 나오면 육수를 철철 넘치게 붓고 단숨에 바닥을 본 다음 다시 육수를 가득 채우고 면을 먹는다. 가난할 때 육수 두 사발은 맛도 맛이지만 근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평양 시내 서쪽 보통강 건너편에 보통뻘이라는 곡창지대가 있었는데 봄철마다 진풍경이 벌어진다.


모심는 일꾼들이 새참(북한 사투리로 곁놀이)으로 냉면을 먹는 풍습이다. 냉면집에 주문하면 중머리(냉면 배달인의 속칭)가 냉면을 날라 온다. 그는 거대한 나무 쟁반 위에 냉면 10여 그릇 올려놓고 한 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다른 손으로는 어깨 위에 쟁반을 붙잡고 좁은 논두렁을 달리는 것이다. 서커스에서나 보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방불케 하니 요즘 대로에 질주하는 택배 오토바이는 저리가라다.


월남 후 남한에는 냉면집이 없기도 하지만 피난민 신세에 고학하다 보니 밥 한 끼도 어려운 형편에 냉면은 꿈에도 맛보기 어려웠다. 학창시절에 평양 피난민이 설립한 교회에 다녔는데 옛날 서울 운동장 뒤편에 있었다. 일요일 예배 후 목사님과 교우들이 우래옥에 가는 길에 가끔 따라 다녔다.


당시 내가 아는 냉면집은 우래옥뿐이었고 고향 맛 그대로니 70년 단골이 되었다. 1946년에 개업한 우래옥은 지금 주차장인 곳에 네모꼴 낡은 기와집이었다. 2002년 월드컵 전후엔가 삼성동에 분점이 생겼는데 주인은 1950년대 우래옥에 시집온 마나님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수년 전 그분이 세상을 뜨자 문을 닫아버렸다.


내가 개척한 교회가 마침 강남이어서 교우들과 함께 그곳에 가곤 하였는데 냉면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교우들이 모두 냉면 광이 되었고 그들의 자녀에게 까지 감염되었다.


진리를 제대로 전할 능력이 없으니 냉면 전도라도 한 셈 일까. 한번은 옆자리에 어떤 사람이 손님 대여섯과 함께 식사하면서 “이 집은 냉면도 괜찮아”라고 주절대는 것이다. 아니 한국의 최고이니 세계 최고인 냉면에 그런 헛소리를 주절대니 홧김에 욕지거리가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무식해도 유분수지 설렁탕이나 먹을 주제에 세계적 명소의 영예를 그렇게 훼손하다니.

 

2. 냉면이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끈 것은 언젠가 김정은이 개성에 냉면을 갖고 온 때부터 인 것 같다. 전에는 주로 평안도 출신 노인들과 그 가족이 우래옥이나 을지면옥에 다녔다. 우리 자녀 손들도 냉면 광이 되어 인천공항에 떨어지자 제1성이 냉면 타령이다.


그런데 김정은의 연탄처럼 검은 냉면이 TV에 소개된 때부터 젊은이들이 냉면집에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특히 여름철이면 기백의 인파가 뜨거운 햇볕 아래 한두 시간 기다리는 풍경을 보며 냉면 맛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지 궁금하고 가련하다. 냉면은 원래 여름 한 철 시원한 맛에 먹는 것이 아니라 사계절 즐기는 음식이다. 더욱이 면만 건져 먹는 것은 냉면 철부지고 육수 바닥 보는 지경까지 가야 고수이고 단골이다.

 

냉면의 내력을 알고 그 진미에 빠지면 향토 음식으로 자손만대에 전수되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어릴 때 들은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인지 원나라인지 고구려에 독 있는 메밀을 보낼 때 먹고 죽으라는 흉계가 있었다고 한다. 현명한 우리 조상들이 그 계략을 간파하고 해독제인 돼지고기와 무김치를 넣어 천하의 진미 냉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냉면에 담긴 비화를 들으면 우리 조상들의 탁월한 지혜와 빼어난 솜씨가 배여 있는 음식이니 감사할 뿐 아니라 옷깃을 여미고 대해야 할 듯싶다.

 
젊은이들의 냉면 열풍이 시작된 후 나는 여름에는 오후 한 시경에, 기타 계절에는 수시로 가는 데 주차도 편하고 붐비지 않으니 분위기 자체가 시원해서 좋다. 예약 손님도 많아 그것마저 어렵기에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70년 고객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냐?”고. 그랬더니 다음부터는 예우하겠으니 이름을 달라고 했다. 지난해 미국서 온 친구가 밤늦게 전화하면서 내일 시간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친구도 북한산이라 냉면 광이기에 이름을 밝히며 예약을 부탁했다. “예약 다 찼는데요“하면서도 받아주니 내가 고객임에 틀림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3. 십여 년 전이라 기억되는데 일간지에 평안도 냉면에 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내 경험과 판단으로는 지금 평양냉면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다. 우래옥과 을지면옥은 8.15해방 후 북한 출신들이 남하하여 설립한 것이고 평가옥도 평안도 사람이 대구에서 시작하여 2000년 이후 분당에서 문을 연 다음 서울로 입성하였다. 서울과 주변에 평양냉면집이 십여 개 있고 사람의 기호에 따라 다름이 있으나 내 입맛에는 우래옥, 을지면옥, 평가옥이 평안도 냉면의 대표자가 아닌가 싶다.

 
냉면 자료에 관해서는 내가 조리사나 영양사가 아니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각기 레스피가 다른 것은 확실하고 냉면 광으로서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냉면은 면발, 육수, 김치의 삼위일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우래옥은 면발이 가늘고 회색빛에 메밀 향이 풍기고 육수 맛은 깊으며 김치는 120% 숙성된 것이다. 을지면옥은 면발이 희고 메밀 맛이 좋으며 육수도 역시 희고 김치는 100% 정도 숙성된 것이다. 평가옥의 냉면 맛은 위 두 면옥의 중간 쯤이고 냉면과 함께 쟁반, 만두, 빈대떡, 국밥 등 평안도 음식이 다양하다

 
사람에게는 각기 고향의 전통 음식이 있어서 자랑도 하고 향수를 잠재우니 여간 귀한 것이 아니다. 평양 옥류관에 다녀온 평양산 친구의 말이 “그것은 냉면도 아니더라”고 했다. 모스크바 냉면집과 서울 탈북민 냉면집 몇 곳에 가 보니 평양냉면이 아니라 북한식 냉면이었다. 전통 음식은 레스피와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인데 옛날 냉면 맛을 본 적이 없고 자료가 부족하니 맛의 미달은 당연지사일 수밖에.

 
냉면은 나에게 음식 이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그 진미(original taste)가 영원히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육의 양식일 뿐만 아니라 실향민의 한을 풀어주는 정신적인 양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향을 떠난 지 70년이 지나도록 향수병에 시달리지 않고 생존하는가 보다. 그러니 냉면은 나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먹은 하늘의 만나와 같은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오, 냉면이여! 나의 영원한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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