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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8/12/26
인생은 자유다
이계준(감리교 원로목사, 연세대 명예교수)


1.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나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기의 호와 불호를 알게 되고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

 

청년기에 이르면 독자적으로 삶의 계획과 실천이 점증하면서 성숙한 단계에 근접한다. 인간은 자유가 있기에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따른 책임도 져야 마땅하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를 민주주의라 하고 그 반대를 독재주의라 한다.

 

구약성서 창세기 첫머리에 인간 창조 이야기가 있다. 창조주가 인간을 자기 모습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영적 소통이 가능한 존재인 동시에 자유 곧 스스로 결단하고 책임지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대물림한다는 원죄의 교리를 따르나 이것은 범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잠재력을 뜻하는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은 주어진 자유로 신의 뜻에 역행할 때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동시에 자유의 행사로 주체적 존재가 된다는 역설을 말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범죄하고 정죄당할 인간을 창조했다면 니체의 말대로 기독교 신앙은 주인 도덕이 아니라 노예도덕으로 전락할 것이다.

 

나의 삶을 회고하면 원죄 의식은 없고 자유가 지배적이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 때 방종이라고 할 정도로 멋대로 살았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짓만 골라 하였으니 어른들 보시기에 버릇없는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노는 것에 미쳐 방과 후 땅거미가 꺼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들과 놀았다. 여름에는 축구와 수영, 겨울에는 스케이트와 썰매를 즐기면서.

 

지금처럼 과외라는 것이 없어 유감없이 놀아 났으니 지상천국이 따로 있겠나! 나는 시달림 없는 어린 시절이 너무 좋아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한 적 없다. 집을 지을 때도 놀이터 옆 땅을 택했으니까. 유학 보내면서도 글로벌 시대에 넓은 세계와 이국 문화도 경험하고 공부가 힘들면 돌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애들은 아빠가 무언의 독재자라고 하니 이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할꼬!

 

2. 나는 멋대로 자라면서 지적 탐구에 전념해야 할 시간을 탕진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기초 지식을 찾느라 헤매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축구선수였는데 중학교 코치가 기술은 좋으나 키가 작고 몸이 약하다며 만년 후보를 면치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정식 선수가 될 거라는 환상에 빠져 자존심도 저버리고 따라다녔다.

 

일요일마다 평양 주변에서 청소년 축구대회가 열리곤 했는데 목사 아들이 교회는 안 가고 축구에만 미쳐 돌아다녔다. 선친은 나의 탈선을 아시면서도 책망하신 적이 없다. 평양신학교에서 종교교육 시간에 미국의 민주주의 교육을 학습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내 주제를 파악하고 아쉬움을 삼키면서 축구를 접었다.

 

나는 고등학교(북한의 고급중학교) 첫 학기 말에 자유를 위한 결단을 단행해야 했다. 공산주의 세뇌 교육과 러시아어 강요 및 일요일마다 강제노동은 자유로의 탈출을 촉구한 것이다. 탈출구를 모색하던 중 자유의 동산 성화신학교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봄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으나 다행히 선친의 주선으로 입학하였다. 교실과 채플, 운동장 어디에도 공산주의 냄새란 없고 온통 자유과 신앙, 젊음과 인간미만 넘쳐 흘렀다.

 

아, 이 일을 어쩌나! 아쉽게도 두 학기를 마치자 교장은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학교는 강제 폐교되었으니. 그러나 그 짧은 세월에 내 마음에 찍힌 자유의 흔적은 일생을 좌우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사회 심리학자 E. 프롬은 <소유냐 자유냐>라는 명저를 남겼는데 성화는 나에게 자유의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3. 1960년도 말 미국 유학을 마치고 Y 대학에 와 보니 군사 정권하의 캠퍼스는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최전선을 방불케 했다. 이 상황은 1970년대에 더욱 고조되었고 마침내 1975년에는 교수 강제 해직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대학의 이념인 “진리와 자유”를 지키려다 5년간 해직되면서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소외 및 신변의 위협이란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러나 신학교 설립 및 운영, 감리교 통합위원 및 헌법 개정, 미국 유학 박사과정 이수, 존 웨슬리 총서 번역 및 출판, 대학생교회 목회 등 여러 분야에서 자유롭고 보람차게 활동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이때가 내 평생 잠재력을 최고도로 분출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자유는 고통을, 고통은 인내를, 인내는 창조를 낳는다는 진리를 실감했다.

 

나는 대학과 교회에서 봉직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대하였다. 학생, 동료, 교인, 친구를 비롯해 사회생활에서 만난 사람들도 무수하다. 그것이 교육이든 설교든 친교든 행정이든 나의 행동거지의 원리는 자유였다.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며 그들의 창의력을 발휘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실수를 책하는 대신 그들의 뜻을 경청하고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권면하였다. 이러한 자유 원리는 업적이나 성과의 시각에서 보면 비현실적일 수 있다. 그것이 이해되고 열매를 맺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마음이 통하고 정을 나누는 친지가 수를 더하는 것은 자유의 원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50 고개를 넘기자 세월은 가속화되어 은퇴에 이르렀다. 은퇴는 만반의 준비에도 낯설고 서먹서먹한 것이었다. 날마다 자동적으로 굴러오던 과제가 하루아침에 중단되니 백지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습관화되었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생리로서는 “인생은 외롭고 허무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 위기는 소위 자유의 혁명 곧 사고의 전환 paradigm shift 없이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따라서 여생을 값지고 보람차게 꾸려 나가려면 자유의지를 총동원하여 사고와 습관을 100% 뒤집는 작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선 날마다 독서, 사고, 집필, 건강관리, 친교 등을 능동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다. 특히 날마다 무엇을 하건, 누구를 만나건 낙관적이고 관용적이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황혼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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