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계준(감리교 원로목사, 연세대 명예교수)
1 . 세상에 직업 수가 몇 개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약 5만여 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원시시대 수렵에서부터 농경 및 상업 시대를 거쳐 산업사회를 맞으면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을 것이다. 21세기는 컴퓨터와 AI의 발전으로 옛 직업군이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직종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금세기 후반에는 지금 인기 직종인 법조계와 의료계는 축소되는 반면 유아와 노인 돌봄과 종교 직종 등은 증가하리라고 한다.
사람이 직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나 우리 구세대의 경우 주로 가정환경과 DNA에 의해 좌우된 것 같다. 의사, 변호사의 경우는 부모의 뒤를 잇는 세습이 태반이다. 그런데 목사의 경우는 대개 세 유형에 속하는 듯하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나 무교의 세습무처럼 대를 잇는 경우, 예언자나 강신무처럼 하늘의 소명을 받는 경우, “넌 머리가 나쁘니 신학교나 가라”(당시 항간에 떠돌던 말)의 경우다.
그러나 위의 경우들이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어 보이는데 스스로 선택하였으나 하느님이 그렇게 작용하였다면 할 말은 없다. 어릴 때는 축구선수, 10대에는 소설가나 영어 교사를 꿈꾸었다. 평양에서 공산주의 세뇌 교육이 역겨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성화신학교에 갈 때도 목사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선택이었다.
1950년 겨울 온 가족이 38선을 넘어 제주도까지 피난 갔을 때 감리교신학교 학생모집이 있었는데 옛 신학교의 분위기가 그리워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봄 선친의 별세는 나에게 인생에 관한 고민을 안겨 주었다.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목사란 직업이 나쁜 것은 아니나 나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온갖 유혹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엎치락뒤치락 반복하던 어느 순간 마음을 굳히고 말았다.
2. 목사란 직업도 고충과 애로에는 예외가 없다. 배우는 써준 대사만 외우고 연기만 하면 그만이나 목사의 역할은 근 10가지나 된단다. 기억나는 것만도 설교, 성경연구, 교육, 선교, 심방, 상담, 회의, 행정, 결혼과 장례 집례 등. 더욱이 50년 목회하여도 A 학점 받기 어려운 설교,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하는 자괴감, 특히 해결도 거절도 불가한 요청에 직면할 때 등등. 때로는 인간적으로 손해, 멸시, 핍박 등을 감수해야 한다.
일례로 교수와 총리를 지낸 명사가 반미 설교자를 강단에 세웠다고 교우들 앞에서 나에게 핀잔을 퍼부은 적이 있다. “아더메치” -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서-목사직을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분노가 솟구쳤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 어쩌겠는가!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교회에 불참하는 그분에게 “J 박사님, 교회에 나오시지요” 권면하였다. 나의 직업적 의무를 100% 완수한 것이 이 때 뿐이 아닌가 싶다.
군사정권 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대학 이념인 ‘진리와 자유’를 수호한답시고 설치다가 5년간 해직의 쓴 잔도 마셨다. 옥고는 면했으나 경제적 빈곤, 사회적 고립, 감시와 신변의 위협 등 작은 십자가를 체험했다. 더욱이 내 탓으로 가족이 고통을 당하니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크로노스)이 곧 은총의 시간 (카이로스 )임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 어간에 대학생교회, 신학교 설립 및 운영, 감리교 개혁 운동, 존 웨슬리 총서 10권 번역출판, 박사과정 이수 등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목사라는 직업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위선일 것이다. 그런데 목사란 위선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신학적으로 설교란 말씀이 목사를 통해 육화 된 것이므로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은 그의 신앙과 생활이 맺은 열매이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솔직히 실패작이다.
친구에게 들은 실화인데 독일지역의 한인교회들이 존경받는 목사를 초청하여 연합집회를 마치고 담소하는 중 목회의 성공담을 물었다고 한다. “목회에 성공하려면 거룩해 보이고 거짓말을 잘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100%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목사라는 직업이 재정과 여성 관계 등 스캔들이 없으면 성공 케이스다.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교회 재정이 서기와 회계 이원제로 운영되어 목사가 관여할 여지가 없다 . 1 5년간 담임한 대학교회에서는 대학 재무부장인 교우가 재정을 관리하였고 개척한 교회에서는 재정부장과 재정 서기 및 회계를 두어 목사는 재정에 관여하지 않도록 했다.
항상 문제의 발단인 목회비 항목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헌금을 목사가 유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대학 재직 시 개척한 교회에서는 십여 년간 거마비만 받았는데 어떤 부자 친구에게 “이 목사는 이중 직으로 돈벌이 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남성은 40대에 늦바람 난다는 속설이 있는데 나는 60대에 그 바람이 불어왔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여성에게 추천서를 써 준 것과 그녀가 어느 모임에서 사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영상이 나타나 자나 깨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매력적인 마귀가 무의식의 지옥 속에 잠재했다 나타난 모양이다. 그 나이에 연애할 자신도 없고 창피해 아내나 친구에게 이실직고도 못하며 안절부절 홍역을 치르자니 환장할 노릇 아닌가. 어머니의 “남자는 돈, 입,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됐었나 보다.
3. 한평생 목사란 직업으로 섬긴 목장은 군대, 교회, 대학 등 주로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대상이었으니 특수 목회라 하겠다. 따라서 나의 목회 철학과 활동은 일반 교회 목회와는 달리 새로운 발상과 지성적이고 수평적 인간관계를 요구하는 유형의 것이었다. 하루 24시간 다방면의 직무를 위해 구상하고 구현해야 하는 과정이 수월한 것은 아니었으나 흥미진진하고 보람찼으며 대과 없이 마무리하였으니 감사할 뿐이다.
다만 나의 한계로 인해 만족한 차원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교우들의 신앙적 성숙과 인격적 사귐, 학생들의 강의와 채플에 대한 긍정적 반응, 동료 교수와 직원들과의 격의 없는 친교와 소통은 나의 활동을 고무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내가 목사로서 가장 보람 있게 느끼는 것은 상대가 누구든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사귀었다는 것이다. 나는 목사란 직업인일 뿐 모든 인간과 다름없이 나약하고 결함 있고 실족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나 이상의 대우를 바란 적도 없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였다. 이것이 나의 생리이고 생각이어서 누구를 대하든 그런 몸 가짐을 지키지 않은 적은 없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90이 넘어서까지 무력한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들, 교우들, 제자들이 많은 이유가 아닌가 싶다. 결국 인생의 성패는 끝머리에 가서 친구들을 봐야 알 것 같다.
나의 90여 년의 인생과 목사라는 직업은 일제강점기, 김일성 독재, 6.25 전쟁, 군사정권, 오늘의 패륜(悖倫)한 세태 등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 엮어진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비의 연속이었다.
‘좀 더 충실을 기했으면’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보람을 느끼니 다행이라 하겠다. 이것은 저 혼자 이룩한 상아탑이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과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뛰어난 재능이나 지혜는 없으나 목회와 교육 및 교회갱신에 참여하도록 길을 열어 주신 선배님들과 동역자들의 덕분으로 알고 감사할 따름이다.
비록 세상이 각박하다고 하나 나에게는 참 너그럽고 평안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멋진 정치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없지 않으나 그래도 나는 ‘목사라는 직업’을 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