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대 목사
김성대 목사는 충산 서산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인천으로 유학(?)을 와서 인천중학,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성균관대학교에 가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서울대 심리학 진단연구소에서 일한적도 있다. 대학전공과 관련있는 분야였다. 그러나 금방 방향을 바꿔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1975년 ‘중원물산’이란 보세공장을 창업하여 경영능력을 쌓았다. 1년 만에 손을 털었다. 사업부진 때문이었다. 1979년 인천에 정착하여 세라믹 회사를 또 만들었다. 1980년 잘나가던 그 도자기 공장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회사는 망했고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대학졸업 후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급기야 숨어 다니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 순간 그에게 다가서셨다. 주님을 만난 것이다. 사업실패를 통해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미국 이민 길에 오른지 어언 30여년 … 지금은 한 교회를 개척하여 30년을 사역해 온 목회자로 변신하여 목회자의 길을 걸어온 김성대 목사 … 그를 찬양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신학공부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한국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1981년 당시 대한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미국에 들어와서 공부하고 계시던 누님, 김인경 목사님이 미국으로 유학을 오라고 권면했어요. 그래서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한신학교는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게 1982년입니다.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네 식구가 돈 한푼 없이 무작정 상경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미국 오클라호마에 떨어졌지요. 누님이 추천해 준 대학교가 오클라호마 베다니에 있는 서던 나자렌 유니버시티(SNU, Southern Nazarene University)였습니다.
유학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3년 동안을 거의 외상으로 공부했습니다. 교회 체육관을 청소하는 등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잠자리를 해결하고 일거리를 받아 일하면서 어렵사리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오클라호마 제일나사렛교회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지금생각하면 그렇게 무일푼으로 도착하여 공부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지요. 1984년에 SNU에서 목회학 과정을 졸업하고 풀러신학교에서 공부를 더 하겠다고 LA에 도착한 것이 1984년이었습니다.
그럼 언제 찬양교회를 개척하셨나요?
난생처음 LA에 떨어졌는데 이미 누님 목사님이 지금의 찬양교회 예배당에서 ‘나성한인나사렛선교교회’란 이름으로 몇 가정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1985년 김인경 목사님이 일본 선교사로 떠나게 되었고 제가 1986년 나사렛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지요. 그래서 1986년 6월 첫 주일에 7가정과 함께 찬양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금년 6월 첫주일 창립 30주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같은 자리에서 찬양교회를 30여년 목회해 오시면서 가장 감사한 일은?
목회하던 중 많은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어느 교회, 어느 목회자던 고난과 시련 없이 목회하는 경우가 흔하겠습니까? 수년전 우리교회에 김영옥 전도사님이란 분이 함께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전도사님의 남편에 의한 일가족 총격자살 사건이 발생해서 세상을 발칵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대형 참사였지요. 네 가족 중 3명이 사망하고 유일하게 딸 하나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요. 그 아이는 믿음가운데 잘 성장해서 지금은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지금도 저하고는 자주 통화하면서 딸이 가끔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아빠를 용서했습니다. 이젠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고 있어요. 목사님 은혜에 늘 감사드려요. . . ”
그 사건은 이제 과거 속으로 묻혀 버렸지만 그 당시 담임목사로서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상한 오해도 받고 세상에서 여러 소문들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런 대형사고라면 교회가 깨지고도 남지요. 그 위기가운데서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저를 지탱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염려마세요. 저희들이 다 해결하겠습니다. 걱정마세요!” 교인들의 그런 위로의 음성 때문에 어두운 고난의 터널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때 위기를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저를 위로하며 교회를 지켜주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참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좌우명을 삼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되자.’ 이것이 저의 목회 방향이기도 하고 우리교회의 표어이기도 합니다. 좌우명이라기 보다는 저는 목회하면서 늘 ‘모든 게 주님의 은혜’ 그걸 외치며 살고 있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목회하는 게 저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당하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금년 창립 30주년을 준비하면서도 정말 ‘은총의 30년’이란 말이 가장 적합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았고 주님의 은혜로 30년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 강사로 자주 나가시지요?
네, 1년에 3-4회 정도 부흥회 강사로 초청되어 갑니다. 아마 지난 20여년 동안 약 200여회 부흥회를 인도한 것 같습니다. 한국이나 미국 뿐만 아니라 과테말라, 브라질, 대만, 독일, 중국, 일본, 몽고 등등 그래도 국제적으로 많이 다닌 편입니다. 특히 치유집회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치유은사를 제게 주셔서 환자들을 위해 특별히 많이 기도하고 치유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30주년을 맞으면서 특히 감사하고 싶은 일은?
그래도 우리 교회를 거쳐가신 목사님들이 교회를 개척하셔서 아름답게 목회하시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감사하지요. 송인철 목사님, 채인석 목사님, 박순길 목사님이 우리 교회 부목으로 사역하시다 교회를 개척하셨고 프레즈노의 목영서 목사님도 그랬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 지교회는 아니지만 그 목사님들이 목회하시는 것을 보면 그래도 우리교회가 축복받은 교회란 생각을 합니다.
목사님 가족을 소개해 주세요
아내 김금순 사모가 저를 잘 돕고 있고요. 3남2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큰 아들 샘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우리교회 로칼패스터로서 찬양과 EM사역을 맡고 있습니다. 둘째 데이빗, 셋째 다니엘, 그리고 지선과 정아 두 딸이 있습니다.
그동안 교단적으로 봉사해온 직책들이 있다면?
한인나사렛전국연합회 회장직을 세 번 맡아서 봉사했고 미주웨슬리언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