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찬선(연합감리교 은퇴 목사)
미국 20달러짜리 지폐에 사진이 나와 있는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의 모습은 얼른보아도 초라하고 사기꾼 같은 인상을 풍겨준다.
그는 오랫동안 정치계에서 활동하거나 혹은 높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현대화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집단적으로 서부지방으로 추방하면서 무자비하게 그들을 학살하던 미군부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는 계획적으로 이번엔 XX카운티, 다음엔 XX카운티 등으로 원주민들의 부락을 쳐들어가 살해하고 축출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러므로 원주민들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땅에서 추방되었으나 백인들은 그들의 재산과 땅을 차지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윤택한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백인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람을 그들의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것을 보면 당시 백인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들의 땅을 빼앗은 것은 강제적인 몰수나 침략행위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을 기독교인 청교도들이 건설한 나라라고 큰 소리 치는 무리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도 종교심도 목전에 보이는 비옥한 토지 앞에는 그들의 신앙은 봄철에 녹아버리는 눈뭉치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백인들에게 앤드류 잭슨은 개척자요 살 길을 열어주는 용감한 은인이었으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잭슨은 철천지원수였다. 그 논 때문에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땅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용기 있고 원한에 찬 원주민 용사들이 그를 생포하려고 철야에 잠복 하였다가 어느날 그가 외출하였을 때 그를 생포 납치하여 원주민 지역으로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근 일대의 원주민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천추의 원수를 재판하여 사형처분하려고 했다. 그때 원주민 총사령관은 체로키족의 추장 주나루스카(Junaluska)였다.
잭슨 사령관을 앞에 세워놓고 재판을 시작하려고 할 때 용감무쌍한 원주민 청년 한사람이 예리한 창을 들고 나타나 “이 놈은 재판할 가치도 없는 놈이다. 제가 처분하겠다”며 달려들었다. 잭슨이 죽는 순간이었다.
이 때 주나루스카 추장은 이 긴박한 순간 자기가 몸에 간직하고 있던 손도끼를 꺼내 그 청년을 살해했다. 잭슨 사령관을 살리려고 자기편인 원주민 용사를 희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주나루스카 추장은 떨리는 음성으로 크게 외쳤다. “나도 이 청년과 똑같은 심정으로 이 놈을 재판 없이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놈을 처단해 버리면 그 다음엔 또 다른 사령관이 나타나 우리를 집단 살해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죽고 죽이는 전투가 반복될 뿐이다. 그 결과 우리의 멸망을 우리가 자초하게 될 것이 아닌가? 만일 우리가 이 놈을 살려 보내면 그가 사람이라면 그 은혜를 알고 우리들을 다시는 살해하지 않고 추방을 중단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놈을 살려 보내려고 한다.” 그 말과 함께 잭슨을 풀어주고 살려 보냈다.
세월은 흘렀다. 잭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830년에 ‘원주민 이주법’을 제정하고 지금의 조지아 주 일대에 살고 있던 체로키 원주민들을 서쪽 오클라호마 주로 추방하는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정오 학교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교로 모이라는 신호였다. 체로키 족들은 더운 여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 티셔츠 차림으로 아이들 손을 붙잡고 학교로 모여 들었다. 그 순간 백인군인들이 순식간에 나타나 그들을 감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뜰에서 힐하던 원주민들도 감금되었다. 그리고 가가호호 방문하여 체로키 원주민들을 샅샅히 뒤져 그들을 잡아 가뒀다.
어느 집에선 밤사이에 어린아이가 죽어 아침에 땅에 묻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백인군인들이 달려들어 그 어린아이 시체를 내버려 둔 채 가족들을 끌어오기도 했다.
잭슨 대통령을 살려준 주나루스카 추장은 이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잭슨 대통령을 찾아가 원주민 이주법을 중지해 줄 것을 간절히 간청하였다.
이때 잭슨 대통령의 태도는 냉담하였고 쌀쌀하고 무뚝뚝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접견은 끝났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워싱턴 정부는 체로키족은 서부지역으로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백인들에게 양도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리고 1938년 11월 17일 4000명의 군대와 3000명의 지원병은 윈필드 스캇(Winfield Scott)장군의 지휘하에 17,000명의 체로키족과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2,000명의 노예들을 645대의 마차에 태워 서부로 추방하는 미국역사상 가장 잔인한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여름옷을 입고 떠난 그 원주민들은 밤의 차가운 바람과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서 감기, 독감, 굶주림으로 심한 고생에 시달리게 되었다. 4개월에 걸쳐 1200마일을 지나 1839년 3월 26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가는 도중에 4,000개의 말없는 무덤을 길가에 남겨야 했다.
지금 오클라호마 주 일대에 살고 있는 4만여 명의 체로키 족은 그때 추방당한 후 먼 길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이다. 그때 그들의 추방당한 기록이 ‘눈물 젖은 길(Trail of Tears)''''이다. 이 글은 당시 지원병으로 갔던 병사 존 부멧(John Bumett)이 기록한 글이다.
이런 방법으로 유럽의 침략자들은 컬럼버스가 미국에 도착한 1492년부터 그 후 약 400년 동안 유럽의 4배가 넘는 남북미 침략에 성공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나라를 건설하였다.
콜럼버스가 미국에 도착한 그 당시의 원주민 총 인구는 약 1억5000만 명으로 계산되었다. 그후 약 400년이 지난 1890년 원주민의 총인구는 25만 명 뿐 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또 그 400년 동안 인구증가율 통계를 계산해 보라.
그 동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 지구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하고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오! 하나님,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400년 동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