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변을 따라 핀 아름다운 야생화
* 아틀란타에 거주하는 송희섭 목사님의 ‘엘카미노 포르투갈 길’을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 중 두 번째로 인기 있는 루트입니다. [편집자]

카미노 상징 조가비 표시판
엘 카미노 프랑스 길을 다녀온 지 1년 반, 그리웠다. 그때의 그 길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다시 짐을 싸서 길을 나섰다. 그때의 그 배낭, 그때의 그 신발을 그대로 신고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포르투갈 길, 포르투갈 길 중에서도 해안길이다. 이 해안길이 의미가 깊은 것은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이 길을 따라 왔기 때문이다.
리스본에 도착했다. 리스본은 비가 오고 있었다. 빗속의 리스본은 잔잔했다. 리스본의 색조는 노란색이다. 건물들도 노란색, 거리를 달리는 트램도 노란색. 빗속에서도 노랑은 노랑이다.

리브본에서 받은 순례자 여권

포르토의 전경. 여기서 카미노 포르투갈 길이 시작된다
리스본 대성당을 찾았다. 우람하다. 깊은 세월의 흔적이 사람을 압도한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들어갔다. 순례자 여권 (credential)을 받기 위해서.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고 나왔다. 나와서도 한참을 바라보았다.
비가 계속된다. 빗속에서 포르토 행 고속버스를 탔다. 3시간 반을 쉬지도 않고 간다. 지나가는 마을들이 예쁘다. 주홍색 지붕과 하얀 벽의 집. 이런 집과 마을들이 빗속에 젖어 지나간다.
포르토 (Porto)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 이름 자체가 항구라는 뜻의 항구도시다. 그 중앙을 도루강이 흐른다. 도루강에는 몇 개의 다리가 있다. 그 다리에서 보는 도시는 절경이다. 무엇보다도 도루강변에서 보는 석양과 저녁노을! 젊은 연인들이 열광을 한다. 이것 못 보고 죽은 사람은 귀신도 되지 못한단다.
이 도시에서 카미노 포르투갈 길을 시작한다.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이렇게 엘 카미노를 좋아하고 그리워할까? 왜 이렇게 때가 되면 카미노의 길을 나설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몰랐던 것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때문이다. 돌아와서는 마치 퍼즐을 맞추듯 온전한 인생으로 맞추어주기 때문이다.
첫발을 내딛는다. 이렇게 첫발을 내딛는다만 비가 내리고 있다. 판초 우의 위에 비가 떨어진다. 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 소리는 비싼 소리다. 아무데서나 들을 수 없는 소리, 소리와 함께 길을 나선다.
길은 해변길. 수려하다. 바람마저도 신선하다. 조금 걷다 보니 길이 데크길로 바뀐다. 유튜브에서 보았던 그 데크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이런 길을 걸어본 적이 있으신지? 20km의 데크길이 해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 그런 길을 걸어본 적이 있으신지?

쉬어가기 좋은 성당
바다는 파랗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햇살에 비친 파도가 은빛을 낸다. 그것이 점점 다가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육지에 부딪친다. 하얀색 백사장에는 꽃이 피어 있다. 이름도 모르는 들꽃들이 여기 저기 군락을 이룬다. 그 사이를 데크길이 이어져 있고 그 위를 걷고 있다.
아름답다. 이런 길을 못 걸어보고 죽은 사람은 얼마나 억울할까. 너무나 억울해서 그 혼은 구천을 떠돌아다니리라.

저울십자가 성당

길에서 만난 무지개
데크길이 끝이 났다. 이어지는 흙 길. 흙 길도 좋다. 카미노다워서 좋다. 계속해서 걷는다. 행복에 겨워 걷는다. 그러다가 독특한 성당을 보았다. 두 개의 첨탑을 가진 성당이다. 첨탑 위의 십자가가 독특하다. 하나는 평범한 십자가, 다른 하나는 저울 십자가가 달려 있다.
아시는가? 저울 십자가의 의미를. 저 저울 한쪽에 우리 인간의 죄를 달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다. 여지없이 은혜 쪽이 내려간다. 항상 우리 인간의 죄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큰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인간은 산다는 이야기다.
다시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을 만났다. 묘원. 묘지 위에는 십자가가 늘어서 있다. 이런 묘지를 만나면 발걸음을 멈추고 오래오래 생각한다.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을 때까지 사람은 살았어도 살았다 말하지 못한다.”

묘원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라는 뜻이고, 삶과 죽음이 같다는 말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어찌 삶과 죽음이 같다는 말인가? 혹 그것을 머리로는 받아 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슴까지 내려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포르투갈은 날씨가 평안하다. 큰 추위도 없고 큰 더위도 없다. 특히 요즘 같은 때는 에덴동산이 따로 없다. 얼마나 기후가 좋은지 이쪽에서는 꽃이 피고 저쪽에서는 열매가 익는다.
길을 걷고 있노라면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그 옆에서는 오렌지, 모과, 올리브가 익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나라에서 좋은 시절을 걷고 있다. 사람들도 좋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서행을 해주고 경적을 울려준다. 아예 차를 세우고 “뷔엔 카미노”를 하는 사람도 있다.

투이 대성당
이 길은 죽음을 품고 걷는 순례자들이 많다. 이 길을 걷다 죽은 아들, 그 아들을 대신해서 이 길을 걸으며 아들의 유골을 곳곳에 놓는 아버지도 있고, 남편의 기일을 맞아, 죽은 남편을 기억하며 이 길을 걷는 아내도 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 길 걷다가 죽으리라 하는 암 환자도 있고, 이 길을 걷지 않고 죽으면 눈을 감을 수 없을 거라 하면서 걷고 있는 팔순의 노부부도 보았다.
이런 사연, 저런 사연을 뒤로 하며 길을 걷는다. 돌길을 걷고 숲길을 걷는다. 바다를 보면서 걷고 진흙탕의 흙길도 걷는다. 조그마한 성당이 보인다. 언제 나타나나? 기다렸던 성당이다. 오늘은 저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홀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들어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생각과 기도에 잠겼다.
두어 달 전에 읽었던 글 하나가 생각났다. 하마스 전쟁을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가 보낸 글이다.
트럼프가 취임하고 얼마 안 있어,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휴전이 된 것도 아닌 어정쩡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이 기자는 팔레스타인의 어느 병원을 취재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가슴 아픈 장면을 보게 되었다.
한 팔레스타인 부부가 다 죽어가고 있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고개를 흔든다. 의사가 없어서도 아니요, 약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돈의 문제였다. 미국 돈으로 500 달러의 돈이다. 하긴 하루 살기도 힘겨운 이 나라에서 그런 돈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돈이 없어 다 죽어가는 어린 아들을 안고 돌아서야 했다. 항의도 하지 못하고, 사정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힘없이 발을 돌린다. 기자가 악을 썼다. “이것들아, 소리라도 질러. 세상이 왜 이러냐고, 왜 이렇게 엿 같냐고 소리라도 질러! 아니면 너희가 믿고 있는 알라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란 말이야!”
소리도 못 지르고, 하소연도 못 하고, 이것이 숙명인 양 힘없이 돌아서는 부부, 그 품에 축 늘어져 있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꺼져가는 눈빛!
기자는 미칠 것만 같았다. 하늘에 대고 악을 쓰다가 그 자리에 덜썩 무릎을 꿇었다. 마치 라스콜리니코프가 모스크바 광장에 무릎을 꿇고 “나는 인류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다!” 했던 것처럼, 그 기자도 무릎을 꿇었다. ‘너’의 고통 앞에.
몇 주 후, 이 기자는 그 부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의외로 그 부부는 생기가 있었다. 아이가 살았나 보다, 생각한 기자는 물었다. “아이가 살았는가?” 아니었다. 그 아이는 며칠을 못가 죽었다.
이 부부도 실의에 빠져 있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제밤 꿈을 꾸었다. 그 꿈에 죽은 아들이 나타났다. 환한 빛 속에서 천사와 같은 옷을 입고. 가장 행복한 미소를 띠면서 아들은 말한다. “아빠, 나는 이렇게 좋은 곳에서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어. 아빠도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나처럼 행복하게 살아.” 이 부부는 슬픔을 접기로 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카미노 포르투갈 길
두 달도 전에 읽었던 글이 왜 오늘 이 시간에 나타나 마음을 흔들고, 하루 종일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사무치는가?
2년 전 오늘, 나는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오늘,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다.

최종 목적지 콤포스텔라

깜뽀스텔라에 도착한 순례자들

-필자 송희섭 목사
송희섭 목사는 한국에서 태어나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사역했고, 미국에 와서 공부와 목회를 했다. 현재는 은퇴를 했고, 아틀란타에서 꽃과 나무를 기르며 살고 있다.